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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배 Oct 31. 2020

“애들은 어떡하려고 시골로 가니?”

양평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한 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애들은 어떡하려고"였다.


높은 교육열과 이를 만족시킬만한 좋은 인프라가 갖춰진 서울을 떠나 전체 학교에 겨우 한 학급이 갖춰져 있다는 깡촌 시골로 들어간다니. 이 말은 요즘 같은 시대엔 아이들 공부시키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릴 법했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누군가 "너는 네 아이가 어떻게 자라면 좋겠니?"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마음과 몸이 건강하면 된다. 딱 그거면 된다"라고 답했다. 이 이상적인 대답은 사실 모든 부모의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너무도 당연해 보통은 저런 류의 질문을 받을 때 대답을 생략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버린다.


"우리 애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어. 의사 꼭 만들고 싶어."

"끼가 많은 것 같으니 예술을 했으면 좋겠네. 아이돌도 괜찮을 것 같아."

"나처럼 돈 안 되는 문과는 안 갔으면 좋겠다. 뭘 하던 돈은 풍족하게 벌면서 살면 좋을 텐데..."


등등...  


나 역시 내가 꿈꾸는 우리 아이의 삶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내가 이루지 못한 꿈들을 아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가끔은 그저 내 욕심으로 아이를 몰아세우게 될까 봐 입을 꾹 다물고는 있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런 욕심들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곤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사교육에 관해서는 확고한 편이었다. 불필요한 사교육으로 아이의 삶을 멍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학원 뺑뺑이만 도는 삶에 지치지 않았으면 했다. 타인의 의해 강제적으로 학습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다.


문제는, 이런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내는 법을 내 스스로가 잘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사교육을 시킬 때 내 아이는 그저 방치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그 시기는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 그러니까 고작 36개월 즈음이었다.


유치원 진학을 앞두고 엄마들의 표정엔 긴장과 결연함이 서린다. 한 달 200만 원은 훌쩍 넘는, 그래서 한 학기 학원비가 의대 학비를 초월하는 영어유치원(이라고 쓰고 사실은 사설 학원의 유치부)은 입학 전년도 초가을에 이미 마감이 된다. 나는 다시 한번 이 나라에 부자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로선, 감히 꿈도 못 꿀 비용을 아이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꼭 영유가 아니더라도 일반 유치원들도 저마다의 교육 철학이 있고 분위기가 있어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맞는 유치원을 찾느라 동분서주한다. 나 역시, 뒤늦게나마 유치원 정보를 수집하느라 마음과 몸이 바빴다. 그 와중에 알게 된 것은, 이미 아이의 또래 친구들은 한글을 떼기 시작하고 숫자를 세며 영어 알파벳도 제법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습지처럼 소소한(?) 사교육을 시작해 유치원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혼란이 찾아왔다.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도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는 내 철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공부를 시작할 무렵, 우리 아이가 사교육을 하지 않아 생기는 장점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모두가 가는 길을 벗어나 있는 아이가 행여나 앞으로의 삶에서 뒤처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 커졌다.


'나의 어줍잖은 철학이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거기까지 번지게 된 순간, 나는 학습지 선생님을 집으로 들였다. 일주일 한 번 단 15분의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은 산더미 같은 일주일 치 학습지를 쌓아두고 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다 엄마의 몫.


나는 매일같이 아이를 앉혀두고 한글 단어를 읽히고, 짝이 되는 그림의 선을 잇게 했다. 아이는 놀이공간이던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엄마의 예사롭지 않은 표정을 낯설어하며 한두 단어를 읽다가는 이내 도망가버렸다.


"엄마, 근데 자동차 놀이는 언제 해?"

"어, 공부 끝나면 해야지. 자 그래서 케이크! 떡! 과자! 그다음은 어떻게 읽을↗까?"

"아, 몰라. 엄마 나 케이크 먹고 싶어!"

"이거 다 하면 먹을 수 있지! 자 그래서, 여기 이거 한 번 읽어볼까? 아. 이. 스. 크. 림. 우와 우리 꿀이가 좋아하는 거네?"


엄마가 아무리 애써 하이톤으로 질문을 던져본들, 아이는 이내 지루해했다. 아이의 그 모습에 어느 순간 버럭 화가 돋았다.


"잠깐만 하면 되잖아. 잠깐이면 되는데 왜 자꾸 놀려고만 하니. 하루 종일 놀면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성장하고 놀이를 통해 사고가 확장된다던, 그래서 노는 것이 곧 삶을 공부한다는 기존의 내 생각을 스스로 뒤집고 있었다. 고작 이 학습지 한두 장 풀자고 말이다.  


불안은 단단할 것 같았던 내 이상을 뒤집어 엎었고 초조함은 아이를 몰아세우는 상황으로까지 나를 몰고 갔다.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알았지만 어쩌지 못했다. 이 시기 아이에게 학습의 규칙을 잡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어린 시기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 아이에게 스트레스만 주는 것은 아닐까. 혼란이 찾아온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기만 했다.


그렇게 구석에 쌓이기 시작한 학습지가 몇 권이 됐다. 밀려버린 학습지를 볼 때마다 내 속은 불타오르는데, 아이는 그 학습지를 찢어 머리 위에 날리며 단풍잎 같다고 깔깔거렸다. 이 모든 상황이 어이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결국 세 달 만에 학습지를 취소했다. "지금이 한글 교육의 적기인데 놓치면 큰 일 난다", "수학의 감각을 깨워줘야 한다", "영어 노출은 반복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여러 차례 끊어가며, 간신히.


그것이 나와 우리 아이가 경험한 첫 사교육이었고 명백한 실패로 남았다.


그러나 실패는 늘 교훈을 남긴다. 나는 그 이후로 아이를 조금은 더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생기고는 더더욱 큰 아이와의 놀이 시간에 건성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제야 아이가 어떤 것에 즐거워하는지, 어떤 것에 좌절하는지, 어떤 것을 욕심내는지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가 특히 노래를 부를 때 행복해하고 가사 내용을 곱씹어 기억하고는 엄마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더 마련해주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유치원 조차 가기가 힘들어진 시기였다. 그런 아이를 또 학원에 보낸다는 것도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다. 집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시간을 가졌다. 우스꽝스러운 엄마의 춤에 아이가 깔깔거렸다. 그러면서 아이도 뒤뚱뒤뚱 춤을 추기 시작한다. 뱅글뱅글 엄마 주변을 돌며 한참을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이제 걸음마에 익숙해진 둘째도 엄마와 오빠의 축제에 끼어들며 제법 엉덩이를 흔들어댄다. 아이가 엄마와 동생과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을 찾아낸 것이다.


아이는 가끔 나를 놀라게 만든다. 언젠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매일 밤 잠들기 전 따라 부른 노래 가사를 통째로 외워버렸다. 어른인 나도 외우기 꽤 까다로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를 1절부터 5절까지 줄줄 외더니 어느 날은 '독도는 우리 땅'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똑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다. 나도 모르는 사실이라 "정말? 그게 뭔데?"라고 되물었더니 "신라장군 이사부"가 두 노래 모두에 나온다고 했다. 의외의 총명함에 고슴도치 엄마가 되어 아이를 칭찬하고 추켜세웠다.


그 순간 나는, 가사를 이해하는 아이의 능력이 이렇게 뛰어난데 아직 한글을 다 못 읽는다고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사교육에 관해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내 개똥철학에 확신을 갖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불안해져서 실패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애정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면,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직은 아이가 어리기에 내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더 이런 시간을 즐기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교육의 문제를 뒤로하고 결국 우리는 시골로 떠난다. 우리가 후회를 하게 될지, 우리의 결정이 옳았노라고 확신을 하게 될지 아직은 나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을 시골에서도 슬기롭게 찾아낼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우리의 사교육 첫 경험이, 남들의 말에 휘둘려 불안해하면서 시작했던 것처럼 너무 많은 말과 정보가 있는 도시의 땅에서는 어쩌면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그런 내 판단에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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