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빌라는 애물단지가 됩니다
우리의 첫 집은 양천구 신월동의 한 투룸 신축 빌라였다.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한 우리는 둘 다 양가에서 지원을 받지 않았다. 결혼 전 둘이 한두푼 씩 모아둔 돈과 대출을 끌어모아 소형 평수의 빌라를 한 채 샀다. 그곳에서 신혼살림을 꾸린 우리는 그래도 행복했다. 넉넉한 도움을 받지 않고 시작했지만, 그 마저도 뿌듯했다. 우리는 젊었고, 튼튼했고, 부지런한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둘이 살기에도 살짝 좁다고 느낀, 10여평의 작은 빌라에서 시작했지만 미래의 우리는 더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반드시 도달할 장밋빛 미래에 우리는 작고 아늑한 신혼살이를 아기자기한 추억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때의 알뜰했던 우리를 스리슬쩍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이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기억은 결혼 5년차인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어여쁜 추억으로 남아있다. 좁은 집에서 알콩달콩, 우리는 참으로 잘 살았다.
문제는, 그 작은 빌라에서의 삶이 불과 1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허니문 베이비로 생겨버린 아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 아이를 봐주실 분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시부모님은 첫 손주를 기꺼이 봐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신혼집은 송파구에 위치한 시댁과 거의 서울의 끝과 끝이다. 시어머니께 1시간 거리를 매일 출퇴근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직장도 송파구에서 더 가까웠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댁에 들어가기로 했다.
1년 사이 제법 늘어난 살림살이를 챙겨 신혼집을 떠나던 날, 내 마음이 한없이 착찹했다. 우리의 신혼이 이다지도 짧을 줄이야. 연애도 그리 길지 않았던 우리에게 온전한 둘만의 시간이 단 1년에 불과하다니. 마음과 마음이 착 달라붙어 하나에 가까웠던 시간은 그 작디 작은 신혼집에서 끝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쉬워도 도리가 없었다. 그 빌라는 아이까지 셋이 살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심지어 산후도우미 분을 부르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작았고, 보행기라도 끌라치면 아이가 열 발자국도 내디디지 못하고 끝이 나버릴 테니 말이다.
사실 신혼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사치에 가까웠다. 손주 봐달랄까봐 도망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다는데,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양육자를 자청하시지 않았나.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이토록이나 작고 갸녀린 것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사실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시어른들께 감사한 마음이 신혼에 대한 아쉬움보다 절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혼집을 비우게 됐다.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 등 대형가전들을 시댁으로 꾸역꾸역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마침 원룸 계약이 만기된 친정 동생이 들어와 살기로 했다. 졸지에 세입자를 둔 집주인이 된 우리는 어깨에 뽕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래. 우리는 그때만 하더라도 전혀 몰랐다. 이 빌라가 우리의 발목을 덥석 잡게 될 것을 말이다.
부동산 정책이나 시장의 상황에 대해 무지했던 우리는 그저 형편에 맞게 작은 빌라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은 합리적이며 현명하다고 자찬했다. 이후에 소소하게 월세가 들어오는 상황도 그저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살다 보니 아이가 둘이 됐고 서서히 분가를 계획해야 할 때가 왔다. 가진 것이라고는 빌라 한 채인 우리는 그제서야 현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빌라를 팔아야 하는데 부동산에 내놓은 지 6개월이 되도록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점점 조바심이 났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서울의 집값이 최고가를 기록한다고 야단이었는데, 우리의 빌라는 5년 사이 고작 1000~2000만 원 올랐을 뿐이었다. 그만큼 오른 예산으로는 그만한 집도 구하기 힘들었다.
네 식구가 다시 10평의 빌라에 들어가서 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시댁에 얹혀 지낼 수도 없었다.
우리가 처한 가장 난처한 문제는 또 있었다. 그놈의 빌라 때문에 우리는 청약 1순위가 돼보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혼부부 청약의 우선순위 조건은 무주택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빌라 한 채를 소유해버리는 바람에 청약은 기대도 못 걸어보는 집주인이었다.
예산은 부족하고 청약도 힘들어진 우리. 달달한 희망을 이야기 했던 빌라는 우리 생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인가. 허탈했다. 알뜰하게 살아보려던 신혼의 의지가 기회의 박탈로 돌아오다니. 절망스러웠다. 서울시내 저 많은 아파트들 중 우리가 들어갈 집 한 칸이 없다니 말이다. 한강변을 달릴 때마다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를 바라보며, 우리는 서울의 주류에 영영 진입하지 못할 것만 같은 위기감이 가슴에 내리꽂혔다.
명백했다. 우리의 첫 부동산은 실패한 것이다. 이제 우리 5년전에 비해 고작 2000만 원 더 오른 예산을 가지고,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