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
이 문장은 나에게 벼락과도 같았다. 내가 아름다움에 갖고 있었던 일차원적인 생각을 단번에 '번쩍!'하고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을 들고 위협하는 사람 앞에서 이성적일 수 없는 것처럼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도이성적이지 못한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고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칼로 위협하는 사람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과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폭력과 아름다움은 이처럼 상대방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어로도 'Fall' in love라고 하고. 이렇게 빠지고 떨어지는 것은 중력에 몸을 내맡기는 행위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복싱에서 상대방의 주먹을 맞고 뻗어버리는 KO. 이처럼 사랑과 폭력은 중력을 거스르고자 하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를 마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작동시키는 트리거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도 폭력적인 '아름다움'을 무비판적으로찬양한다. 심지어 이 아름다움은 소수에게만 집중된 불공정한 자원 아니던가? 타고날 때부터 누군가는 무방비로, 또다른 누군가는 핵무기가 장착된 채 태어나는 것이다. 매체의 도움만 받는다면 아름다움의 정도에 따라 전지구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J. 로스탕이 폭력에 대해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이란 폭력도 극대화되면 신으로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죽이면 그는 살인자다. 수백만 명을 죽이면 그는 정복자이다. 모든 사람을 죽이면 그는 신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선빵에 맞고 이성적으로 독후감을 쓰기란 나에겐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눈치 채신 분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본디 선빵이라 함은 모르고 맞아야 온전히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줄거리를 아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