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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Oct 21. 2021

고양이에게 다정한 나라

종이책의 시대가 졌다지만 여전히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검색 엔진, 소셜미디어와 달리 짐작 가능한 범주 너머의 세상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검색엔진은 필연적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중심으로, 내가 재단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뻗쳐 나간다. 물론 유익하다.


소셜미디어 역시 내가 주체가 되어 알고 싶고 듣고 싶고 보고 싶은 이야기를 나에게 제공하도록 '허락한' 결과물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다. 특히나 요즘에는   매너를 맞추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피드에 올라오는 사진의 색감만 봐도 누구의 일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알고리즘이란 녀석은 내가 세운 울타리를 견고하게 지키는 문지기 같아서 내가 받아들일 법한 정보는 추려서 안으로 들여보내고, 도무지 결이 맞지 않은 콘텐츠는 문전박대한다. 한편, 책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하고 무심한  말을 걸어오다 무방비한 나의 세계를 흔든다.




여전히 종이책을 편애하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이상, 전자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읽게 된 <하루는 열심히, 인생은 되는대로>는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여행 에세이라는 기본 정보도 없이 페이지를 넘겼는데 공교롭게 첫 챕터에서 내가 살고 있는 터키와 터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반가운 마음. 이 책에서 소개한 터키 사람들은 이러했다.


"그래도 터키 출장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건 역시 눈부신 바다나 신비로운 고대 도시가 아닌, 터키의 사람들이었다. 터키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애정은 유별나다. 한국인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들은 정말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한다." (중략) 오지랖 넓기로 치면 이탈리아 맞먹을 거 같지만 터키인들의 오지랖은 이탈리아인들의 유난스러움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떤 의도나 잔꾀가 보이지 않는달까. 순수함, 순박함과 다른 어떤 천연덕스러움을 가진 사람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민족의 후예답지 않게, 그들에겐 으스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허술하다."


희미하게 닿을 듯 말 듯 한 느낌을 활자로 정리해 놓은 글을 보면 부지런히 밑줄을 긋는다. 책 속 이야기는 나의 경험과 버무려져 생기를 머금게 된다.



터키 이민을 온 지 5개월쯤 지났을 때 한국에서 이모들이 방문했다. 목을 축일 겸,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주문 후 돌아오는데 이모가 말하길, '이 카페 단골인가 봐'라고 한다. 사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카페 주인과 너무나도 반갑게, 오랜 친구 대하듯 인사를 나눠서 단골인 줄 알았다고 했다. 어느새 나도 터키 사람들의 환대에 자연스럽게 물들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터키 사람들은 다정하다. 마음의 온도는 사람들이 동물이나 약한 사람에게 대하는 걸 보면 안다. 성인에 비해 연약하다고 여기는 어린이, 또 장애인들을 배려한다. 물론 세계 어딜 가도 통하는 진리인 '케바케'는 있겠지만 말이다.


특히 길 고양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터키 사람들은 대체로 착한 사람들 아닐까? 하는 순진한 마음마저 든다. 길에는 심심치 않게 고양이와 개들을 위한 물통이 보인다. 아침마다 길 한 구석에 사료들이 쌓여있다. 고양이들이 굶지 않도록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다. 친절의 대상이 나를 향하지 않아도, 따뜻하게 누군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감동을 받는다. 꼭 나에게가 아니라도 괜찮다. 작고 약한 이들을 돌아봐 주는 것을 보며 은은한 위로를 받는다.



지난 5월 코로나19로 인해 터키 전역이 완전 봉쇄(락다운)되었을 때, 정부에서 내린 지침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기도 했다. 봉쇄 기간 동안 주인 없는 동물들이 굶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달라는 당부였다. 한국을 떠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왔지만 이곳에서도 다정한 이웃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선을 넘는 오지랖은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쉽게 외면할 수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한 터키 사람들의 오지랖은 한국인들의 '정'처럼 느껴졌다.




25년 전쯤 미국으로 이민 간 첫째 이모가 있다. 코로나 시국에, 이모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터키에 이민 간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신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미국까지의 먼 거리만큼이나, 소식도 멀어졌었는데 처음으로 이모가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하쿠나야, 잘 적응하고 있니?
사랑이는 잘 지내고 있는지?
이모들과 재미있게 지내다가 떨어져서...
생각날 때마다 기도는 하고 있어.
늘 조심하고 건강해라.
우리가 처음 미국 왔을 때
그 기분이지 않을까 해서...'



25년 전 이모가 느꼈을 외로움, 서러움, 고단함, 막연함들이 와닿았다. 목사님인 이모부의 아내로서 네일숍에서 일하며 네 식구의 생활을 지켜냈다. 생계는 퍽퍽했고 지금보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더 매서웠을 것이다. 왜인지 지금 내 나이쯤 되었을 이모의 꼭 다문 입과 굽은 등이 떠올랐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어제처럼 느껴지는 외로움이 있다면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십 수년간 연락하지 않은 조카에게 메시지를 보낸 이면에 이모의 진심이 느껴져서 한 편으로 애잔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저희는 잘 지내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좋은 이웃들을 만나서, 많이 배려받으며 지내고 있어요.'


라고 답했다.


‘정말 다행이다’라고 쓴 답장에서 이모의 안도하는 숨과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느껴졌다. 그래, 참 다행이다. 터키 사람들이 다정해서. 아무쪼록 몇 년이 흐른 후에도 나의 마음의 온도가 식어지지 않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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