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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퍼튜니티 Jun 18. 2022

바람이 불었고 우리가 생겨났다

마음이 쓰여서

어두컴컴한 공간에 강력한 에너지가 생기고 원자단위 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무슨 연유였는지 한 공간으로 뭉쳐 행성을 만들었다.


원자 단위로 봤을 땐 거기서 거기인 모양과 움직임인데 어떤 건 세상을 인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인지한 '어떤 것'은 시간이 흘러 인간이 됐다.


원자 단위로 쪼개보면 여전히 비슷한 물질인데 어떤 건 에너지를 얻고, 생명이라 불렸다. 몸에 있는 피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이지만 몸 밖으로 나온 피 한 방울은 생각이 있지도 않고 생명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생명은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하늘 위에서 불어온 거대한 바람이 서울 어느 동네에 떨어져 주변을 어지럽혔을 때 답 없는 궁금증이 생겼다. 인간이 될지 바람이 될지는 우주 어디서 정해진 걸까. 바람이었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답 없는 질문이 계속되고 인간의 상상력으로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지구가 생겨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기하다. 바람 하나, 파도 한번, 잠깐 비치는 햇빛이 우리들의 생존을 도와준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바람을 맞으면 생명이 시작하는 도입부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거대하고 경이로운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이 탄생하고 흘러간다는 믿음도 생긴다.


평일 퇴근길에 얼굴을 때리는 바람은 차갑고, 건조했다. 두 다리는 멀쩡해서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얼마나 일주일을 바삐 보냈는지 쏟아지는 졸음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나에게도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고 헤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갈 길을 갔다. 바람은 계속 불었지만 더는 바람이 왜 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지나쳤다.


조금은 쌀쌀한 밤공기

어둑해진 하늘

짧은 반바지

편한 슬리퍼

가끔 부는 바람

걸어가면서 먹는 아이스크림.

편안하게 느꼈던 순간들이다. 이 순간들은 삶을 버티는 힘이 되고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는다. 너무 사소하고 당연한 순간들이라 자주 잊어먹는 감정이기도 하다. 바람이 왜 불었는지 고민할 정도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군것질하며 골목을 걷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잠드는 생활은 나쁠 게 없다. 바람이 만든 기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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