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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Jun 28. 2023

나의 러닝 속도는 '같이'

강북 최대 러닝크루 UTR(언타런) 운영진 박소영

어른이 되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어릴적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또래와 방방에서 꺅꺅 소리 지르며 날뛰다가, 허기지면 500원짜리 문방구 아이스크림 하나도 한입씩 나눠먹으면서 자랐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놀이터, 종례를 마친 학교 운동장엔 친구들이 바글거렸다. 그 아이들은 사라진 걸까.


수요일 8시가 되면 어릴 적 이름도 모르고 같이 방방을 뛰었던 추억 속 또래 친구들이 소환된다. 그 어린이들은 건강하게 자라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뛰고, 부모님 용돈  없이 영리하고 야무지게 노는 어른이 됐다. 동네 놀이터에서를 벗어나 서울 온 동네를 넘어 지방 마라톤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서울의 강북 최대 러닝크루 언타런 이야기다.


 크루가 계속 성장하려면 문화를 만들고 운영을 책임지는 '운영진'이 있어야 한다. 언타런은 총 7명의 운영진이 이끌고 있다. '같이의 가치'라는 슬로건을 목표로 러닝 초보자와 고수가 매주 정기 러닝에서 같이 완주한다. 체육대회, MT, 스피드 훈련, 등산도 종종 한다. 운영진들은 도대체 왜 이 일을 하는 걸까. 러닝크루 운영진하면 돈 많이 버나? 대단한 커리어 이력이 돼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나? 언타런 크루 운영진 막내 박소영을 인터뷰했다.



UTR러닝 크루 운영진 박소영/ photo by @class0321

- 소영이의 러닝 시작, 언타런 러닝크루 가입의 계기는?

러닝은 다이어트를 위해서, 러닝크루는 친구들이 따라갔다가 가입했어. 바디프로필 준비 할 때, 친구들이 유산소를 위해 러닝을 하라는 게 이해가 안 갔어. ‘헬스장 바이크를 타면 되지 왜 뛰어?'’라고 생각했거든. 첫 러닝은 인플루언서 '온슬'의 등산 번개로 시작했어. 단순히 좋아하는 인플루언서랑 같이 운동하고 싶어서 했다가 그 후에 갑자기 러닝도 하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니깐 같이 무턱대고 뛰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 안 뛰었어. 그래도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항상 러너들이 주변에 있었어. 헬스장(F45광화문) 멤버들이 경복궁 러닝을 자주 하고, 자신들이 속한 언타런 러닝크루에 초대해서 몇 번 갔다가 정회원이 됐어.


- 언타런의 어떤 분위기나 모습이 좋았어?

처음엔 러닝크루에 '러닝'을 하러 간 게 아니라 '헬스장 친구'들 보러 간 거라 소속감은 없었어. 사람 많은데 기 빨려서 뒤풀이는 안 갔고. 그런데 작년 5월 체육대회를 하면서 어른들이 건강하고 순수하게 노는 게 신선하더라고. 서로 모르는 다 큰 어른들이 100명이 줄다리기 하나에 목숨 건 듯 열심히 하고, 처음 본 사람과 2인 3각 경기를 하며 영차영차 걷고. 어른들이 드넓은 운동장에서 굵은 끈 몇 개로 치러진 게임에 하루종일 웃고 소리 지르고, 진심으로 뛰는 거 보니깐 어릴 적 가을 운동회가 생각났어. ‘어른이 돼도 순수하게 놀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2022년 언타런 X 긱스 체육 대회/ photo by @class0321

- 체육대회 하나로 애정이 생겨?

 러닝크루의 꽃은 마라톤 대회지. 체육 대회 이후 작년 10월 첫 하프마라톤 대회인 서울 달리기 때 응원을 받으면서 감동을 많이 했어. 그날, 비 오고 추워서 뛰는데 현타 올 때 즈음 우리 언타런 깃발이 보이고 그 아래 먼저 완주한 크루원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고, 환호하는 거야. 다들 뛰느라 힘들 텐데, 비 맞아서 추울 텐데 말이야. 그때 ‘이래서 크루활동 하는구나’ 싶었고, 받은 응원 나도 되돌려주고 싶더라고. 이후로 춘천마라톤, JTBC마라톤, 올해 동아마라톤 응원을 진심으로 했어.


- 마라톤의 주인공은 러너고, 응원은 조연 같잖아 너도 주인공 해야지!

감동 스토리엔 주인공과 조연 모두 필요하잖아. 언타런은 러닝 초보자가 많아서 응원보단 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아. 다른 러닝 크루는 오래 러닝 하거나 중상급자가 많아서 한번 뛰었으면 다음번은 응원을 하는 핑퐁이 있다곤 하는데, 우린 아직 안 그래. 그래서 크루원들을 많이 알고, 열렬한 응원도 받아본 내가 응원 나서서 해야겠더라고. 근데 내가 뛰는 것도 아닌데, 대회 전부터 준비하고, 응원 전략 세우고 대회 내내 완주에 간절하고, 피니시 라인에서 감동받아서 눈물 날 거 같고 그래.   

춘천마라톤에서 UTR 크루원들이 러닝 전 즐거워 하고 있다/ photo by @class0321

- 여러 응원 드라마 찍은 것 중에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

 언타런 운영진 종철오빠 2022년 춘천 풀 마라톤을 응원했을 때. 종철오빠는 잘 뛰고, 풀 마라톤 뛴 경험도 있어서 걱정을 안 했어.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질 않는 거야. 우리 모두 오빠를 정말 걱정했어. 앞서 간 사람들이 종철 오빠 쥐 나서 늦는 거라고 알려주는데, 무리하고 있을 거 같아 또 걱정되더라고. 한참 뒤에 저 멀리 크루원 세정이가 핸드벨을 치는 소리가 들리고 병희 오빠는 무거운 UTR 크루 깃발 들고뛰고, 나머지 다 ‘전종철 파이팅' 소리 지르면서 같이 뛰었어. 오빠가 다리 아픈데, 우리가 같이 뛰니깐 어쩔 수 없이 뛰기도 하고 '다시는 풀마라톤 안 하겠다'라고 농담도 하다가 '그래도 같이 뛰니깐 힘이 되네'라고 말하더라고. 피니시 라인을 향해 혼자 뛰어가던 뒷모습이 멋있고 감동이었어. 그날 그 오빠 우리가 완주시킨 거야.


- 근데 마라톤 대회 때 수만 명의 사람들 중에 크루원은 어떻게 찾아내?(동아마라톤에는 3만 2천 명이 뛰었다)

나도 신기해. 근데 그 많은 사람 중 내가 찾는 사람이 딱 보여. 대회 때는 대부분 주최 측에서 나눠주는 단체티를 입고 있어서 정말 비슷비슷한데 청계천 건너편에 뛰고 있는 크루원들을 발견한다니깐. 응원할 때는 뛰는 사람들의 속도를 다 미리 알고 있어서, 예측 하면서 그 사람을 찾긴 해.

2023년 동아마라톤의 광경, 크루 응원단들은 친구들을 기막히게 먼저 찾아낸다


- 뛰는 것과 응원하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힘들어?

응원이 훨씬 힘들어. 뛰는 건 나에게만 집중하면 되지만 응원은 모든 선수에게 신경 써야 하거든. 그리고 챙길 것, 해야 할 것도 많고 소리 지르고 같이 뛰느라 체력 소모도 커. 올해 동아마라톤을 예시로 하자면, 우선 주자들 챙겨줄 콜라, 물, 에너지젤 그리고 플래카드, 사진과 동영상을 위해서 여분의 휴대폰과 충전기 배낭에 매고 다녔어. 총 5개의 지점을 지하철 타고 미리 가서 땡볕에서 주자들이 한 명 한 명 다 올 때까지 기다려. 만나면 응원하고 사진과 동영상 찍어야 해. 나중엔 주자들 에너지 보충 위해서 콜라, 물, 에너지젤 미리 세팅해 놓아야 하고. 응원단은 혹시나 주자들 줄 간식 혹시 모자랄까 봐 물도 아껴 마셔. 응원 정말 힘들긴 한데, 주자들 3~4번씩 만나서 뿌듯했어.

  

2023년 동아마라톤에서 서울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서 응원하는 소영이와 RUNIS 러닝크루 친구들

- 결국엔 올해 4월부터 언타런 운영진을 맡게 됐어. 재산 축적이나 커리어 개발에 도움이 되고 있니?

 운영진 활동은 자원봉사고, 본업은 운동이나 마케팅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서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나는 크루의 인스타그램 운영이랑 홍보, 마케팅을 맡고 있어. 사실 운영진은 세 번이나 거절했어. 근데도 크루장 상현오빠가 부탁하는데 또 거절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해보기로 했어. 이왕 하기로 한 거, 애정하는 크루니 깐 잘하고 싶어.


- 정기러닝 운영만으로도 고정비용이 많이 들 텐데, 운영이나 행사할 자금은 땅 파서 구하는 거야?

 나도 운영진이 되면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얼마 남았나 회계장부를 봤더니 쓸 돈이 없더라고. 우리가 분기마다 1만 원의 회비를 받고 있지만, 정기러닝 짐 보관료, 주차장 이용료, 음료 구입비로 고정비가 나가니깐.


 근데 SNS 운영을 맡으니깐 브랜드 협찬 제안이 많이 들어와서, 이걸 활용하고 있어. 5월 동안 정기런에 참가한 모두가 '태초수(@taechosoo_official)물 한 병씩 마셨어. 처음엔 물협찬 한 번으로 들어왔는데 담당자를 설득해, 한 달 동안 지원받았어. 이거 작은 듯 하지만 정말 큰 크루 복지거든. 크루 MT를 앞두고도 술값, 음식, 단체 운동복 값 아끼려고 '느린 마을 막걸리(@slowvillage_official)와 밀키트, 운동복(@plaknit_official)협찬 받았어. 브랜드 측이 제안한 것에서 협상을 해서 더 좋은 조건이 성사되면 뿌듯해.


 회사 점심시간에 책상에서 샐러드 먹고, 주말이나 퇴근 후에도 크루 인스타그램 메시지 확인하고 담당자와 커뮤니케이션하면 힘들긴 한데, 크루원들 '우리 이런 것도 하네' 하면 좋더라.

언타런 한달간 급수를 지원해준 태초수

 

- 어떨 때 운영진으로서 보람과 재미를 느껴?

 크루들이 좋은 경험과 혜택을 받을 때. 인플루언서들은 러닝화 선물이나 훈련 클래스 등 이벤트에 쉽게 당첨되지만 대부분은 기회가 없잖아. 얼마 전 밸롭(@ballop_official)에서 러닝화 론칭을 했는데, 우리 크루 20명이 공짜로 받았어. 브랜드 측에서는 여러 러너들의 피드백을 받거나 홍보 콘텐츠를 늘릴 수 있고, 우리는 크루원들에게 러닝화를 줄 수 있잖아. 러닝 훈련도 따로 받으면 수업료를 내야 하는데 얼마 전엔 칼렉(@kaleg.official), 7월엔 런콥 (@run___cop)코치의 훈련 세션을 마련했어.


- 언타런은 낙오자도 기다리고 같이 마지막까지 뛰어주는 데, 귀찮지 않아?

 전혀. 누군가가 우리 크루에 러닝을 하러 왔는데, 그 끝이 '낙오해서 버려졌어'로 남는 게 싫어. 운영진의 역할은 맨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낙오할 뻔했지만 그래도 해냈다'라고 기억 남게 하는 거야. 우리 슬로건이 '같이의 가치'라는 좀 옛스러운 말이지만, 이 슬로건의 힘을 믿어. 요즘은 러닝크루가 많고, 실력자도 많아서 낙오자는 기다려주지 않는 러닝크루도 많아. 우리도 더 빨리 뛰는 페이스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근데 크루장 상현오빠가 단호하게 '더 빨리 뛰고 싶으면 그 페이스가 있는 러닝크루에서 뛰고, 우리는 같이 뛰는 크루야'라고 말했어.


항상 느린 페이스(6'30') 페이서를 맡는 본능오빠와 채원이, 느린 사람들 끝까지 챙기는 운영진과 기다리는 크루들이 대단하고 생각해. 왜냐면 처음 뛰거나 느린 친구들은 '그냥 저 걸을래요', '저 버리고 가세요'이런 말 하는데, 그런 사람에게 채근하지 않고, '괜찮다'라고 응원하고 '할 수 있다'라고 설득하는 게 힘들거든. 근데 정말 우리도 포기하려던 사람이 마지막까지 완주하고 '덕분에 뛰었어요'라고 말하면 뿌듯해.   

- 운영진을 맡고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다 다른데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 마디씩 해줘.

 우리의 크루장 상현오빠는 최종 결정권자이지만 항상 '소영이가 하고 싶다면 해봐'라며 믿어줘서 고마워. 종철오빠도 평소 조용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정리를 잘해주고 귀찮을 법 한 부탁도 '그래', '응'이라는 다정한 대답을 해줘서 든든해. 민영언니는 운영진 선배 중 유일한 여자라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 남자의 언어와 다른 여자만의 섬세한 언어와 배려와 챙김이 있잖아. 승윤오빠는 장난 많이 치고 말도 틱틱하지만, 다정하다는 거 다 느끼고 있어! 이훈 오빠는 러너들이 '너네 크루 뭐 돼?'라고 말하면 '우리 언타런에 이훈있어ㅋ(그는 정말 잘 달린다)' 이걸로 끝이야. 능글맞은 친오빠 같아서 우리 크루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하고. 한빈오빠는 운영진 중 유일한 MBTI의 F를 맡고 있어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따스하게 먼저 챙겨줘서 고마워. 나도 정말 잘해볼게.


나는 단체 생활을 좋아하지 않는다. 회사, 학교, 심지어 가족일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 회사 3년 겨우 다녔는데 언타런에서 활동한지 4년차다. 돈을 받고 일하는 회사에선 6~10명이 한팀이 되서 성과를 내는건 참 힘들어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됐던거 같은데, 언타런은 서로 너무 다른 70명이 모여서 와글와글 뛰는게 다인데 러닝을 끝나고 집에 오면 힘을 얻었다. 이 크루의 매력은 뭘까.


'같이의 가치'라는 고리타분한 이 슬로건이 참 소중하다. 생각해보면 난 단체생활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좋은 단체생활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회에서는 성과에 따라 줄을 세워 저성과자에게 경고를 먹였고,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도 이전보다 더 잘하고 빠르게 해달라고 닥달을 받는다. 낙오하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고 느린사람은 민폐끼치는 사람이 된다. 낙오하지 않으려다가 자주 탈진 했다.


난 러닝도 그렇고 일도 느린편에 속한다. 러닝 속도는 1km에 7분대가 적당하고 글을 한편 쓰는데 일주일이 꼬박 걸린다. 거북이 러너지만 ‘풀마라톤, 해볼까?’라고 생각한데는 언타런의 역할이 정말 컸다. 아무리 내가 늦게 들어와도 언타런 친구들은 응원존에서 기다릴거란 확신. 내가 나를 포기라려고 할 때 할 수 있다고 말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 속 나를 발견하고 마음껏 '언니다'라고 외쳐주고, 힘들어서 닭똥 같은 눈물을 짜내면서 뛸 때, '언니 거의 다 왔어요'라면서 응원존 바로 옆에서 함께 뛰어준 소영이. 내리쬐는 태양아래 잠실 종합운동장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송지희 파이팅'이라고 함박웃음을 외치면서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어주던 언타런 친구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지만, 삼십대 청춘 러닝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우리’다.


[서울 취미 러닝 크루 및 인터뷰이 SNS]

1. 인터뷰이 박소영 생활체육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at._.sso/

2. 서울 강북 최대 러닝 크루 언타런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u.t.r_crew/

3. 언타런 정기러닝: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50분/ 매달 마지막 주는 토요일 저녁에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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