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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대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의 소중함.

by fragancia


맑고 따뜻한 눈 속에 선명한 내가 비친다. 누가 보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지만 실상 나 혼자 그분을 보고 있다. 반가움에 “안녕하세요”라며 밝은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같은 음성의 답변을 기대할 수 없다. 따뜻하게 잡힌 손이 축축해지면서 등 사이로 식은땀이 흐른다.
어색했던 첫인사~ 훗날 이 순간이 내 평생 기억 속에 두고두고 각인될 장면이 되어 내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주는 강인한 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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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밑 3cm를 유지했던 세일러복의 여중생은 방과 후 친구와 함께 하원을 하면서 노래를 연습했었다. 수어(수화) 노래 공연이 불과 2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나는 그 공연에 참가하지도 않는데 같이 연습해달라는 친구의 간절함에 따라 부자연스러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길을 가며 혼자 하기에는 얼굴을 붉힐 수 있는 15살 소녀들이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NRG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 우윳빛 커튼 나풀거릴 때 잠이 든 그대 뺨에 키스를~~ - 도입부에 나오는 수어 표현은 친구와 헤어지고도 한참 손에 익어 혼잣말처럼 까딱이곤 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길을 가다 그 노래가 나오면 손이 먼저 반응했으니 학창 시절 그 노래의 가사를 나는 온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회사와 집을 정신없이 오가던 25살이 되었을 때 친한 언니로부터 마산에 사는 친구를 소개받게 받았다. 서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친구를 만나고 싶어 김해에서 그녀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녀의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눈앞이 아찔 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맑고 따뜻한 눈~ 푸근한 미소에서 얼마나 좋은 어머니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내 망설임을 알 아첸 친구가 엄마의 손을 잡고 통역을 해주고 있었다. 멀리서 온 친구라고~ 내 손을 잡아보라고 이끌던 그 손~~


미리 알았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으련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중학교 때 친구를 통해 배운 수어를 처음 해 보였다. 발발 떨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딱 두 가지 수어를...
내 손을 꼭 잡고 있었기에 수어는 더 부자연스러웠고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잠시.. 그분은 활짝 웃으며 똑같이 내 쪽을 향해 반갑다는 수어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전혀 앞을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고열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기에 수어를 익혔고 같은 농아분을 만나 결혼 후 3자녀를 낳았다고 했다. 내 친구였던 그녀 그리고 여동생과 남동생~ 너무 다행스럽게도 듣고 말할 수 있는 정상적인 아이들을 보며 한없이 감사를 느꼈으리라. 하지만 막내를 낳고 얼마 있지 않아 눈이 서서히 안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는 절망감을 가져왔을 것이었다.


서글프게도 유전이라 남동생 비슷한 시기에 장님이 되었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 커다란 상실감 앞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수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마의 수어를 말로 통역해주는 친구는 자주 들었겠지만 목이 매어있었다.

헬렌 켈러처럼 태어날 때부터 눈도 귀도 들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못 살았을 거라고 하지만 수어를 익힌 후 눈이 멀었기에 그나마 상대방의 손을 잡고 대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내 간단한 질문에도 하나하나 설명하며 수어를 이어가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아이들의 어린 모습만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 모습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엄마라고 불리는 그 목소리.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는 수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노래가 아닌 의사소통을 전문 통역사를 통해 익히면서 이제 통역 없이 그분의 수화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친구와 어머니께서 내가 사는 곳에 방문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식당에 앉아 유심히 모녀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밥과 국의 위치 그리고 젓가락을 사용해 움직있을 수 있는 범위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반찬을 차례로 나열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위치와 어떤 음식이 있는지 딸의 손을 만져서 인식하는 모습. 다른 사람보다 훨씬 식사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정말 맛있다."라는 수어를 보고 나는 그분이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도 잊은 체 웃어 보였다.


그분을 만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분께는 생에 단 한 번만 이라도... 빌었던 기적과 같은 일을 나는 매일 누리고 있는데 그 감사함을 몰랐다. 그분을 알고부터 일상에서 힘들다고 투덜댔던 내 말들은 부끄러움이었고 내가 좌절할 때마다 내가 가진 것들에 깊이 감사해야 함을 느끼게 해주는 스승이 되셨다.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수어로 - "바람이 좋은 곳, 향기가 좋은 곳...” 그분과 걸었던 메타세쿼이아 길. 나뭇잎들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바람을 따라 흘렀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12112250_0_crop.jpeg 함께 걸었던 메타세쿼이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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