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이모의 암 재발로 항암치료에 들어가면서 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외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에게 이모의 소식을 비밀로 할 것.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될까 봐 친정식구들은 걱정하고 있다.
며칠 전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외할머니 댁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말벗이라도 해드리려 나는 자주 할머니댁을 방문한다. 한 손에는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단호박 죽을 들고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거실로 들어설 때였다.
"아이코... 꿈자리가 뒤숭숭해야~ 우째 막내가 나와서 울었을꼬..."
"할머니 막내 이모 꿈꿨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다 부었다. 어디 아픈가?"
"아니에요. 할머니~ 이모 잘 있어요."
'어미는 새끼가 아프면 촉으로 안다'라고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의 아픔이 전해진 것이었는지... 퉁퉁부은 할머니의 눈을 보며 내 코끝이 찡해졌다. 빨리 화제를 바꿔야 한다. 자연스럽게! 신속하게!
"할머니 못 보던 바지네요? 몸빼바지 이뻐요. ^^"
"이쁘냐? 이거 느그 엄마가 사준거여~ 쫌만 기다려봐잉~"
불편한 허리를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할머니는 작은방으로 가셨다. 잠시 후 할머니께서는 입고 계신 몸빼바지와 똑같은 바지 하나를 내쪽으로 툭 던지셨다.
"이거 입어봐라... 겁나게 편해야~ 색깔도 이쁘고잉"
'이게 아닌데...' 바지와 나를 번갈아 보는 할머니의 눈빛에서 '지금 당장'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는 바지에 몸빼바지를 겹쳐 입으려했다.
"벗고 편하게 입어야제~ 쓰겄냐?"
결국 나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운동복을 벗고 몸빼바지를 입었다.
"우리 막내도 요런거 잘 입고 돌아다녔는디..."
"할머니 저 어때요? 진짜 잘 어울리죠? 이거 저 주실 거죠~ 제가 집에서 잘 입을게요. 감사해요."
막내 이모 이야기를 하며 흙빗이었던 할머니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인생을 늘 베풀면서 살아오신 할머니는 작은 것이라도 주는 행복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몸이 불편하여 여러 번 수술을 하셨는데도 동네분들에게 사람 좋기로 소문난 우리 할머니~ 그 사랑을 알기에 나는 할머니의 몸빼바지를 입고싶다 말했다. 할머니에게 주는 행복을 느낄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할머니 저 아이 올 시간 되었어요. 이대로 입고 갑니다. 할머니랑 저랑 몸빼 커플이네요."
"그려~ 이쁘다 이뻐~ 또 온나잉"
아들은 내가 입은 몸빼바지를 보고서 한바탕 웃었다. 왕할머니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고 했더니 선물은 좋은 거라며 "엄마 예쁘다"라고 말해주는 착한 녀석~ '언젠가 할머니께서도 막내 이모의 병을 알게 되시겠지. 조금만 더 늦게... 더 늦게~'
내가 입은 몸빼바지를 보고 활짝 웃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