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개찰구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by 신지훈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 개찰구 앞에 섰다.

앞사람이 카드를 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안내 음성이 또렷하게 울렸다.


<청년>


순간 귀가 쫑긋해졌다. 지하철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의 세대를 구분해 주는구나 싶어서. 더불어 ‘당신은 여전히 창창한 청년이군요’라는 축하 메시지 같은 느낌도 들었다.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청년’ 호출의 이유를 검색해 보았다. 서울시 기후동행 카드를 사용하는 청년이라는 뜻이었다. 평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가용 출퇴근을 하다 보니 몰랐는데, 청년이기에 추가로 할인이 제공되는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라떼도 그런 할인이 있었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음성 안내는 “어서 오세요, 청년이시군요”라는 인사라기보다는 “할인이 잘 적용되었습니다”라거나 “이 카드 실사용자가 청년 맞지?”라는 확인에 가깝다.


몇 년 전 잠깐 있다 사라졌다는 ‘어르신, 건강하세요’라는 말은 결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만 65세 이상 어르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경로우대 카드를 어르신이 아닌 사람이 부정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그 음성은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행복하세요’라는 멘트로 바뀌었다고 한다. 많은 어르신들의 민원이 속출했는데 대놓고 노인임을 인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게다. 게다가 무임승차한다고 무안 주는 거냐는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어르신 호칭은 금방 사라졌는데 청년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청년이라는 호칭은 기분 좋은 것이니까?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영유아였던 제이를 데리고 예방접종을 위해 소아과에 갔던 초보 아빠 시절의 어느 날, 나보다 연배가 많아 보이는 접수대 직원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버님, 아이 생년월일 뭐예요?”


나는 순간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혹시 내 뒤에 진짜 아버님이 서 계신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내게 아버님은 아직 어르신이 들어야 하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재차 확인이 필요했다.


소아과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를 부르는 호칭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저 익숙지 않은 말이라서 더 어색했다. 그날 이후 나는 당황하지 않는 ‘아버님’이 되었다. 그때 나는 ‘청년’임과 동시에 ‘아버님’이기도 했다.


이제 내릴 차례가 왔다. 카드를 찍었다.


<삑>


아무 멘트도 나오지 않았다. 청년도 아니고, 어르신도 아니었다. 아버님일 리는 더욱 없었다. 시스템은 나를 향해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청년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중년’이라는 뜻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존재하지만 굳이 호명할 필요는 없는 사람. 혜택 안내도, 경고도 필요 없는 나이. (이상한 것에 의미 부여하는 나이)


어쩌면 다행이다. 혹시라도 ‘아저씨입니다.’ 혹은 ‘영포티입니다.’ 같은 말이 나왔더라면, 나는 아마 카드를 한 번 더 찍어봤을지도 모르니까. 개찰구가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70년대생이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 분포상 가장 많은 세대다. 아이에게 아직 손이 많이 가고, 부모님은 점점 연로해 도움이 필요해진다. 아이의 학원 상담 일정과 부모님의 병원 예약을 같은 날 캘린더에 적어 넣고 챙겨야 하는 나이이다. 청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말 그대로 중간에 낀 세대라 중년이었나 싶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불려 다니지만, 정작 이름이 불리지 않는 세대이기도 하다.


문득 UN에서 청년의 기준을 65세까지로 상향했다는 정체불명의 뉴스를 떠올려 본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가짜 뉴스가 중년들 사이에서 열렬히 공유되었던 건, 누구에게도 보호받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심지어 국가 정책에서도 '나이 기준 미달'과 ‘소득 기준 초과’로 번번이 탈락하는 낀 세대의 고단함을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사실이라면? 나 역시 기꺼이 개찰구 앞에서 ‘청년입니다!’라는 인증을 받고 있겠지?


다시 개찰구를 돌아본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어쩌면 그 무심함은 소외가 아니라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굳이 나를 청년이라 추켜세워 증명하라 하지 않고, 어르신이라 부르며 공경의 부담을 지우지도 않는 상태.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지나가라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고 걷는 이에게 건네는 가장 매너 있는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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