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질린 남자

회복보단 적응

by 신지훈

해가 져도 무더웠던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2025년 8월 5일. 신사동에서 비즈니스 저녁을 마치고 나오니 온몸이 술과 더위로 흥건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며 진정하던 중,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역사를 나와 상가 건물 화장실로 뛰어갔지만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하복부에 긴장이 풀리려는 직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대로로 나와 다른 건물을 찾아 걸었다.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찾으며 걷던 중, 내 몸이 갑자기 아래로 쏠렸다. 늘 다니던 인도였다. 상가 건물 앞 계단을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딘 것이다. 넘어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양팔꿈치로 얼굴부터 감쌌다. 머리는 다행히 무사했다. 대신 오른발목이 한순간 확 꺾였다. 창피한 마음에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발목을 몇 번 돌려봤다. 걸을 만했다. 그래서 그대로 집에 갔다.


그날 밤부터 발목이 부었다. 아킬레스건 쪽이 묵직하게 당겼다. 통증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다가도 자세를 바꾸는 순간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틀을 끙끙 앓았지만 마음은 태평했다. 괜찮겠지. 며칠 지나면 낫겠지. 몸은 늘 그랬다. 적어도 기억 속의 몸은.


하필 사흘 뒤에 골프 약속이 있었다. 골퍼들은 안다. 골프 약속은 쉽게 취소되지 않는다. 비가 와도 가고, 몸이 안 좋아도 간다. 취소 사유로 인정받으려면 거의 입원 수준은 되어야 한다. 발목 통증은 그 기준에 못 미쳤다. 못 걷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멀쩡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애매한 상태였다. 결국 나는 발목 보호대를 차고 나갔다.


스윙을 할 때마다 오른쪽 다리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 신경 쓰였다. 괜히 더 조심하게 됐고, 스윙은 자연스럽게 작아졌다. 원래도 하찮은 실력이지만 그날따라 공은 더 맞지 않았고, 스코어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돌았다. 동반자들에게 발목이 다쳤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끝나고 나니 발목은 더 부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얼음찜질을 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십 대 시절 나는 축구광이었다. 매일 공을 찼고, 매일 다쳤다. 발목이든 무릎이든 늘 어딘가는 문제였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심하게 아팠을 때도 사우나 한 번이면 충분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면 통증은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뛰었다. 다쳤다는 기억보다 또 뛰고 있었다는 기억이 더 많았다. 몸은 쉬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알아서 회복됐다.


며칠만 쉬면 되겠지. 한 주쯤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긴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양말도 두꺼워졌다. 계절은 분명 바뀌었는데 발목은 그대로였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통증은 남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 운전을 할 때, 아무렇지 않게 걷다가도 불쑥 신호를 보냈다. 아직 여기 있다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존재를 드러냈다.


지금은 2026년 1월이다. 반년이 지났다. 여전히 아프다. 짜증 나는 사실은 대단히 아픈 건 아니라는 점이다. 병원에 뛰어갈 만큼도 아니고, 일상을 멈출 정도도 아니다. 그래서 더 애매하다. 완전히 낫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아프지도 않다. 걷다 보면 한 번씩 의식하게 되고, 달리지는 않는다. 뛰는 건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동작들을 이제는 한 번 더 계산한다. 몸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 먼저 바뀌었다.


요즘 나는 발목에게 배운다. 완전히 낫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예전처럼 뛰지 못해도 여전히 걸을 수 있다는 것.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약속은 계속되고, 일상은 돌아간다는 것. 십 대의 몸은 회복을 돌려주고, 중년의 몸은 적응을 가르친다.


어제는 출근길 계단에서 중학생 아이가 두세 계단씩 뛰어내려 가는 걸 봤다. 가방이 등에서 펄럭였고, 신발 끈은 풀려 있었다. 나는 난간을 잡고 한 계단씩 내려가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도 저렇게 뛰어내려 가던 몸이 있었다고, 저렇게 몸을 믿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발목은 아직 아프다. 언제 완전히 나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끝내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 발목이 접질린 이후로 나는 조금 달라졌다. 더 천천히 걷고, 더 자주 쉬고, 더 많이 망설인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빨리 가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면, 이 속도도 괜찮은 것 같다.


(술 마시고 스마트폰 보면서 걷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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