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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쥬스 Nov 24. 2020

김장 대전

얼마 전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정재형, 김종민, 데프콘과 함께 김장을 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습니다. 하루종일 걸려 만든 김치를 지인들에게 배달하는 것으로 방송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한자릿수로 내려가기 시작하면 전운이 감도는 집들이 있습니다. 바로 겨울맞이 행사인 김장 때문. 이맘때 쯤이면 온갖 커뮤니티들에는 김장 하러가기 싫다. 김장 없어져라. 김치는 제발 사먹자 등등의 하소연글이 폭주합니다.


친한 언니가 결혼하고 나서 본인은 시댁을 잘못 만났다길래 얘기를 들어보니 김장철 주말에 형부가 언니를 시골에 끌고가서 1박 2일을 감금(?)시키는 바람에 김치공장 직원마냥 일을 했다는 겁니다. 너희들 마당에 산처럼 쌓인 배추를 본 적이 있냐며 언니는 절규했죠. 다 집어치우고 야반도주를 하려고 했다는 말에 모두 웃었지만...


아마도 언니의 시댁은 시골에서 다같이 모여서 김장하는 집이었을 테고 새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불러다가 호되게 일을 시켰던 모양입니다. 배추가 5백포기쯤이었다며 다시는 김치 안먹을거고 이혼할거라며 진저리를 치던 언니의 모습이 이맘때쯤이면 떠오릅니다. 그 후 언니는 김장하러 가지 않았고 언니의 가정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5백포기를 하든, 50포기를 하든, 김장을 하려면 이래저래 정말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추를 씻어서 절이고 양념과 속을 준비해야 하고 뒷정리까지... 어느 하나 간단한 일이 없습니다.


어릴적엔 이모집에 가서 다같이 김장을 했습니다. 여자들이 김치를 준비하는 동안 이모부와 아빠는 마당에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었습니다. 잘 버무려진 김치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나면 위에 포대를 덮어서 마무리를 하고 겨우내 그 김치는 땅 속에서 아삭아삭 잘 익어갔죠. (이게 바로 지금 김치냉장고의 원리인 듯 합니다)


시간이 흘러 사촌언니들, 그리고 저와 동생들이 대학생이 되고 하니 집에서 밥먹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집밥먹는 사람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대량으로 김치를 하는 김장은 사라졌고 그때그때 김치를 간단히 담궈먹거나 사먹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시댁은 김장을 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이모들이랑 어머님이 평일에 모여서 김장을 하셔서 남편은 퇴근하고 저녁에 가서 김장 김치에 보쌈을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주말에 김장김치를 가지러 가야 하나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시댁에선 제 결혼과 동시에 주말로 김장 날짜가 변경되었습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은 김장김치를 시어머니께서 택배로 보내주셨는데 너무 눌러담으셔서 터져서 왔다거나 김장김치 먹으러 오라 하셔서 주말에 시댁에 간다고들 했기에 시댁에서 김치를 당연히 주시겠거니 생각한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죠.


'그래 뭐, 김치 먹을거면 가서 일하고 받아와야지'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전날에 와서 배추 절여라 등등의 주문에 남편이랑 시부모님이랑 한바탕 한 것 같았습니다. 왜 주말에 쉬지도 못하게 김장을 1박 2일을 시킬 작정이냐며. 결국 저희는 하루만 가서 버무리기만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만 김장을 안해본 저로서는 여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 첫 김장에는 평일에 같이 김장하셨다던 이모들은 오지 않으셨고 시할머니, 시어머니 그리고 저와 남편 이렇게 넷이서 매우 불편한 분위기 속에 80포기의 절인 배추에 양념을 치대느라 허리가 나갔습니다. 온 옷에는 김장양념이 덕지덕지 붙었고 양말은 버려야 했으며 남편은 제 눈치만 보며 김치통을 닦고 배추를 나르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김장을 해본 적이 없는 저는 양념을 제대로 못바르니, 너무 많이 발랐니 등등의 잔소리 크리에 멘탈이 바사삭 부서졌습니다. 대체 왜 시동생은 일하지 않는것이며 저 80포기는 누가 다먹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도 함께... 아마 그 수많은 김치는 이번 김장에 오지 않으셨던 이모들이 가져가셨겠죠. 어머님은 그 김치를 나눠주면서 새 며느리 들인 자랑을 하셨으려나요.


돌아와서 2박 3일은 몸살과 근육통에 시달렸습니다. 사무실에서도 아고고 소리가 절로 나서 사람들이 김장했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매 해, 김장하러 가기가 싫고 하고 나면 너무 힘이 들어서 매번 남편에게 화를 냈습니다. 겨울을 제일 좋아하는 저는 슬몃 코끝이 추워지는 이맘때를 특히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이 시기는 겨울이 시작된다는 기쁨보다 김장을 해야한다는 것 때문에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고 제 속도 모르는 엄마는 양념 버무리고 바르는건 일도 아니라고 사돈 어른이 밑재료 다 준비하시고 하는거니깐 재료값을 드리고 와야 한다 해서 배춧값도 챙겨서 드렸습니다.


생각해보니 일도 하고 돈도 드리고... 그냥 그 돈으로 김치를 사먹는게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더 편했을 것 같네요.




얼마 전 김장시즌 답게 배추를 화장실 욕조에 절이는게 괜찮냐는 이야기로 온라인이 떠들썩 했습니다. 댓글은 반반으로 나뉘었습니다. 화장실에 왜 음식을 두냐. 더럽다  vs  욕조가 더러우면 화장실 청소를 안하는거냐로 전쟁이 났죠. 김치 절이는 용도로 대형 스테인리스 통이 나와있으니 그걸 베란다에서 사용하면 될텐데. 저도 시댁에서 절임배추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 빼느라 거기 두셨다더군요. 베란다도 배수가 되는데 왜 굳이 화장실에...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화장실이라는 공간에 음식물을 들이는 것은 좀 아니라는 의견입니다만, 비닐 깔면 깨끗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으시니. 그렇지만 남자들이 서서 볼일을 볼 수도 있고 변기 물내릴 때 꼬박꼬박 덮개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고 하니 여하튼 그 곳에는 음식물을 두면 안될텐데...


때문에 절임배추를 사자고 건의했다가 사서쓰는 절임배추는 못쓴다며 제 의견은 묵살(?)당했습니다. 나날이 재료들은 좋아지고 공장이 대량으로 작업하니 싸고 더 깨끗하게 잘 절여서 보내줄 것 같기도 한데 굳이 힘든 방식을 고집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뭐, 제가 잘 모르는 중요한 이유가 있겠죠.


사먹는 김치는 중국산이니, 깨끗하지가 않니 하면서 굳이 집에서 김장을 고집하는 분들 많은걸로 압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산 재료로 김치를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으며(원산지 위조는 불법입니다), 공장들은 위생점검을 받고 작업자들 모두 위생복과 위생모를 착용하고 작업을 합니다.


올해는 시댁과 사이가 나빠진 덕분에 결혼한지 7년만에 김장을 면제받았습니다. 저는 며느리병이 아직 치료가 덜된 터라 마음이 불편해서 남편에게 그래도 김장에 가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남편은 괜히 억지로 갔다와서 본인 잡지 말고 그냥 집에 가만히 있으라더군요. 사실 남편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저도 한 해 쯤은 김장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마음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돌아온 남편이 올해는 배추가 좀 적더라 하며 실컷 일해놓고 봉다리에 딸랑 김치 한포기 들고 온 것을 보고 슬몃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왜 시댁 김장이 싫었나 가만 생각해보니 어린시절을 제외하고 김장을 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먹을입도 별로없는 시댁 구성원에 비해 누가 다 먹을지도 모르는 배추가 너무 많아서였던것 같습니다. 늘 이듬해 김장엔 작년 김장 김치가 남아서, 묵어서, 시어서 누구를 줬다면서 왜 매년 이고생을 하며 이 많은 김치를 이고 사시는지가 불만이었으니 시댁 김장이 즐거울 리가 없었죠.


김장을 다녀오면 몸이 아팠고 시댁 어른들 사이에서 장시간 진행되는 김장내내 불편한 그 분위기도 싫었던 것 같습니다. 옷소매가 흘러내려 양념이 묻을까 남편에게 옷 좀 걷어달라고 하는 것 마저 뭐가 그리 재밌으신지 쟤 좀 보라며 요즘 애들은 시어른 앞에서 별짓 다한다는 말도 들었거든요.(좋아보여서 그리 얘기하신 것이라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직도 많은 며느리들은 난 김치 안먹으니 시댁 김장에 안간다고 하면 되바라진 애가 될까봐, 김장하러 가기 싫다고 하면 욕 먹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아쉬운 주말을 김장에 할애합니다. 물론 김장하는 것이 좋아서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점점 김치를 사먹는 것이 익숙한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고 저 역시 그냥 필요할 때마다 사먹는 것이 편하거든요.


제가 김치공장 대표는 아니지만 요즘은 파는 김치도 집에서 담근 김치만큼 좋은 제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치를 잘 먹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고요. 물론 김장이 끝나고 수육에 갓 담근 김치를 먹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긴 합니다만 그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 몇몇 여자들의 허리를 갈아넣은 집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며느리들이 힘들다, 싫다 하면 김장에 호출 안하면 어떨까요? 안받고 안먹겠다는데도(또는 사먹을건데) 부르면 마지못해 울면서 가는 며느리들이 많습니. 그리고 친정이 김장을 해서 친정김치를 먹겠다는데도 시댁 김장에 호출되는 바람에 남편만 가라 했더니 친정 김치만 김치냐 왜 시댁 김장에 안오냐 하며 김장대전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댁가서 김장하기 싫다는 며느리 강제로 호출해봐야 결국 다녀와서 남편을 잡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특히나 만삭인데 또는 애기 낳은지 얼마 안됐는데 시댁에서 김장하러 오라고 했다, 시누는 김장이 끝나면 김치통만 들고와서 그냥 김치를 가져간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도 우리나라에 며느리를 저리 취급하는 집이 있나 싶어 놀랍습니다.


언제쯤 며느리들은 내 의견을 당당하고 편하게 말하고 그 의견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런지.  


"저 김장 안하고 김치 사먹을래요" 또는"저 김치 안먹습니다"라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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