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분노, ON
“그깟 말은 누가 못해!”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지.”
“단어 하나 바꾼다고 뭐가 달라져?”
이렇게 말하며 말의 힘을 얕보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그럴까?
말이라는 게 정말 ‘입 밖으로 순식간에 쓱 흘러나와 버리면 그만’인 그런 쉽고도 가볍고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한 걸까?
정말 그렇다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라는 속담이나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같은 고사성어가 왜 여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겠는가?
캐나다 가수 줄리 블랙(Jully Black)은 단 한 단어만으로 핍박받는 자들의 분노를 서늘하게 표출했다.
2023년 2월 19일, 블랙은 NBA 올스타전이 열린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스타디움에서 경기에 앞서 캐나다 국가 오 캐나다(O Canada)를 열창했다.
(오늘의 TMI.
미국 농구 리그로 알려진 NBA에서 왜 캐나다 가수가 캐나다 국가를 부르는 걸까?
총 30개에 달하는 NBA팀 중 연고지가 캐나다인 팀이 있기 때문이다.
그 팀의 이름은 바로 토론토 랩터스(Toronto Raptors)!
대체로 실력이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2019년에 NBA 우승컵을 거머쥐기도 했다.)
수많은 관중과 전 세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구 코트 한가운데 서서 마이크를 쥔 블랙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가사를 틀리고 말았다.
블랙은 ‘그리고’를 뜻하는 ‘and’를 말해야 할 순간에 ‘~의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on’을 넣어 불렀다.
미묘하게 가사를 바꿔 부른 후에 블랙이 보인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세심하게 계획된 선택이었음을. 세계적인 무대에서 순간적인 실수로 국가 가사를 바꿔 불렀다면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and’을 내뱉어야 할 순간 침착하게 ‘on’을 노래한 블랙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한층 당당하게 빛났다.
캐나다 국가 ‘오 캐나다(O Canada)’에는 ‘our home and native land’이라는 가사가 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우리의 고향이자 원주민의 땅’쯤 된다.
줄리 블랙은 토론토에서 나고 자란 캐나다인이다. 그런 블랙은 캐나다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수없이 듣고 불렀을 게 틀림없는 그 노래, ‘오 캐나다’를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원주민 아동들이 살해되어 집단 암매장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는 끔찍한 뉴스가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다. (<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제7화 ‘캐나다에서 금기어가 된 단어’ 참조). 블랙은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말간 얼굴로 ‘오 캐나다’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융합하는 ‘멜팅팟(melting pot)’을 강조한다. 반면, 캐나다는 오랫동안 다양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모자이크(mosaic)’ 사회를 표방해 왔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가 주장해 온 ‘모자이크’라는 슬로건은 말 그대로 슬로건일 뿐이었다.
앞에서는 모두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고 떠들면서 뒤로는 원주민들을 탄압하고 억압한 조국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블랙은 용기를 냈다.
전 세계가 귀를 기울일 그 무대 위에서 블랙은 ‘our home and native land’를 ‘our home on native land’로 바꿔 불렀다. ‘우리의 고향이자 원주민의 땅’이라는 구절이 ‘원주민의 땅 위에 세워진 우리의 고향’으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and’를 ‘on’으로, 정말이지 단어 하나를 바꿨을 뿐이지만, 마치 반전 드라마처럼 내용이 180도 바뀌었다.
‘our home and native land’라고 쓰면 ‘우리 백인 정복자들의 고향’과 ‘원래 그곳에 살았던 당신들의 땅’이 마치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our home on native land’라고 쓰면, ‘당신들이 원래 태곳적부터 살았던 그 땅 위에 우리가 지어 올린 우리의 고향’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에 함부로 침범해 그 땅을 빼앗은 다음 ‘우리 것’이라고, ‘우리의 고향’이라고 우기며 살아온 과거를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단 두 글자로 이뤄진 ‘on’이라는 짧고 묵직한 단 하나의 단어로, 블랙은 원주민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우아하면서도 서늘하고, 강렬하게 드러냈다.
긴 설명 없이 단 한 단어에 담아낸 역사의 무게와 변화를 향한 열망!
언어의 힘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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