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회사 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간 공개하기 어려운, 평범한 직장인이 감히 겪을 수도 없는 일들을 경험했던 1년 7개월간의 재취업 생활을 드디어 마감하게 되었다. 2018년 12월 육아휴직 시작 때부터 퇴사를 결심했던 터라 서운하기보다는 시원한 마음이 든다. 이젠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회사의 명함 대신, 진짜 날 것의 김지현으로,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생각해보니 나의 진로를 나의 온전한 의지로 결정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돈 때문도 아니고 상황 때문도
아니고 육아 때문도 아니다. 스스로 깊게 고민해 보고, 나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키워드를 위해 자발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음악을 그만둔 것도, 대학을 휴학한 것도, 졸업하지 않은 채 취업한 것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한 것도, 그리고 재취업을 한 것도 나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뭔가 게운치 않은 부분이 많았다. 돈 때문이었고,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고, 회사에서 쫓겨나서 상처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였고, 워킹맘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이번 퇴사 결정은 온전히 내가 내린 결정, 그래서 더 잘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든다.
비서, 또 비서, 또 비서
03년, 대학교 3학년 학생이어야 했던 시기에 나는 고졸 학력으로 대기업 파견직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맡은 직무는 임원 비서였지만 말이 좋아 임원 비서였지 부서 내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사환* 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챙겨 부서 책상에 올려놓고, 커피포트에 수시로 물을 채워 넣고, 간식이 떨어지면 간식을 사다 놓고, 복사와 전화받기가 내 주 업무였다. 손님이 오면 문지기처럼 나가 문을 열어주고, 부서 내 우편물 보내거나 정리하고, 사무용품이 떨어지면 사무 용품을 사다 놓고, 부서 내 화분에 물을 주고, 영수증을 처리하는 일 등이 내가 하는 주된 업무였다.
*사환 : 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
나의 아저씨 대기업 파견직 이지안의 업무가 나의 업무였다
내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와 역할이 있었다. 바로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 수많은 정규직들 사이에서 유일한 비정규직. 일부러 똑똑하고 학벌 좋은 인재를 뽑을 필요가 없는 직무.
나는 없었던 직장생활
2003년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해 육아휴직 직전인 2018년 11월까지 나는 대부분의 직장 생활을 비서로
일했다. 그 사이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 4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하긴 했지만 나의 직무는 상사가 핵심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핵심업무가 아닌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개인보다는 팀과 조직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한다. 하지만 비서의 직무는 그 경계가 좀 애매모하다. 분명 회사를 위해 일하지만 상사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영역까지 업무에 포함되니 이게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좀 어려울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세금을 대신 납부해 준다거나, 아침, 점심, 저녁을 챙겨줘야 된다거나, 가족 휴가를 위해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하거나 심지어 자녀의 숙제를 대신 해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재능과 능력은 상사가 지시한 업무처리를 할 때 빛이 났다. 돌이켜보면 그 정성을 나 자신에게 쏟았으면
지난 시간이 후회스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체력과 정신 모두를 회사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약 10년간 떠받들었던 K사장에게 갈아 넣었다. 심지어 어린 딸이 아침마다 엄마를 찾으며 울고불고 떼를 쓸 때도 나는 상사의 콜에 응했고 회사에 출근했다.
2017년 8월 21일 출근 4일째
엄마에게만 집착하는 내 딸, 뭔가 잘못됐다.
2017년 8월에 다시 재취업했을 때 내 딸은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였다. 우리나라 나이로는 3살,개월 수로는 21개월. 아침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아이, 밥을 안 먹겠다고 밥상을 수도 없이 엎고한번 울면 몇 시간씩 울어 재끼는 아이라는 것을 애써 모른 채 했다. 재직 중인 1년 7개월 동안 딸 아이의 돌봄 선생님은 4번이나 바뀌었다. 내 딸은 엄마와의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가족이 아니면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아이였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딸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집착했다.
아빠가 손이라도 한번 잡을라치면 화를 내고 온몸으로 거부했다. 모임에 데리고 나가도 이모나 삼촌들과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말을 걸어도 모른 척 했으며,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놀이터에서도 친구들과 섞여 놀지 않고 혼자 노는 아이였다.
나의 보물들 춘이 + 빡이
아직 너무 어린 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고 지금 나는 누구 수발을 들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회사가 잘 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족도 아닌 상사의 일을 내가 왜 처리하고 있는지 나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벌컥 눈물이 났다. 대한민국에 너무도 흔한 직장인, 워킹맘으로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악착같이 매달렸을까?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깨달음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는 순간, 회사에 나가는 것이 공포가 되었다. 딸아이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사회적 위치 따위는 없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워킹맘이라는 타이틀은 가족이 행복할 때만 가치 있는 것이었다. 내 딸이 불행하다면 그런 타이틀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결론내고, 생각이 정리되자 바로 육아휴직을 통보했고, 가장 빠르게 회사를 뛰쳐 나왔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의 목표는 가족의 행복이었다. 엄마로 살아도 괜찮았다. 나를 잃지 않을 자신,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울 자신, 남편과 더욱더 애틋해질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워킹맘으로 살 때보다 더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내 생활의 중심에 가족과 아이들을 둔다는 것이 나다움을 포기하는 일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가장 나답게 살아가기
지나고 보니 후회 가득한 날들이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나중으로 미뤄야 했던 삶이었고 그리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어릴 적엔 돈이 필요했고, 직장이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 채용되기 위해 애쓸 필요도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이유도 없다. 나는 나를 위해 살고, 내 아이들을 위해 살고, 내 가족을 위해 살면 된다. 가장 나답게 살면 된다.
퇴사(退社) 회사를 그만두고 물러남
이제 회사를 놓는다. 미련 없이 물러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와의 끈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지난날을 쿨하게 떠나보낸다. 이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