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 calm and carry on
진부한 얘기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불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시지프스를 떠올린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시지프스 말이다. 그 형벌의 가장 가혹한 점은 그 노동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밀어올려도 결국엔 다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 시지프스는 처음부터 다시, 계속해서, 그러니까 영원히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내 불안과 나의 관계가 딱 그런 격이 아닐까. 이러저런 수를 써서 간신히 불안을 잠재워놓지만 불안은 지금 저기 꼭대기에서 천천히, 다만 아주 천천히 내게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아직은 불안이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불안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것을 눈치채고 그것을 다시 내게서 멀리 떼어놓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갖출 것이다.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내 삶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불안을 관리하면서 살게 된 이후부터는 말이다.
불안을 내 삶에서 내쫓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극복하길 바란 것도 아니다. 나는 극복한다는 서사에 반감이 있다. 삶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은 전혀 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의 잔재들, 그 사건으로 촉발된 변화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어떤 부분들을, 내 인생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그걸 딛고 더 나은 내가 된다는 류의 순진한 성장담론을 나는 믿지 않는다. 순진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모욕적이라고 느낄 정도다. 정말로 무언가를 겪은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내가 비관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이건 어떤 패배주의나 무력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 선택은 오히려 실용주의에 가깝다. 극복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것을 분류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인간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내 불안과 우울과 기타 등등을 관리하면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싶다.
정말 좋아하는 우화가 있다.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존 카메롯 밋첼 감독의 <래빗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장면을 이야기한 책이 있어 책을 인용합니다. 정혜신/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창비, 219쪽)
베카 엄마, 이게 사라지기는 해?
냇 뭐가?
베카 이 느낌, 이게 사라지기는 해?
냇 아니, 그러지는 않는 것 같아. 난 그랬어. 그리고 11년째 계속되고 있어. 달라지긴 했지만.
베카 어떻게?
냇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의 무게랄까. 어느 떄가 되면 견딜만해져. 그 아래서 빠져나올 수 있는 무언
가로 바뀌어. 그리고 지니고 다닐만해. 주머니 속 별돌처럼. 그리고 가끔이지만 까먹을 때도 있고.
그런데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안에 손을 넣게 돼. 그럼 거기 있어. "아 맞다, 그거."
그건 끔찍하기도 해. 하지만 항상 그렇지 않아. 가끔은 좀...그게 맘에 든다고 하긴 그렇지만,
그건 네 아들 대신 네가 지니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그것마저도 놔버리고 싶진 않은거야.
그래서 계속 지니고 다녀. 그러니까 그건 사라지지 않지만, 음...
베카 뭐.
냇 나쁘지 않아...좋아.
<래빗 홀>중에서, 어린 아들을 잃은 베카가 엄마에게 아들을 잃은 슬픔이 사라지는지 물으며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것은 불행일 수 있고 비극일 수 있으며 상실일 수 있고 우울일 수 있고 불안일 수 있다. 어쨌든간에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 그럼에도 일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을 재정의하고 우리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일. 그런 일들을 생의 곳곳에서 벌어지고야 만다. 그럴 때마다,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완전히 쫓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어날 수 없다. 그것 자체가 내 삶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내 삶이 그것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엔 <래빗 홀>의 대사처럼 무게와 크기에 관해서는 그래도 기대해볼 만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엔 바위 같았던 비탄이 주머니에 넣고 다닐만한 돌멩이가 되는 것.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얼마간은 그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도 또 불쑥 거기에 손을 넣게 되고 그러면서 '아, 맞다. 여기에 이런 게 있었지.'하고 깨닫게 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을 계속해서 살게 하는 것,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의 삶에 애착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은 결국 시간의 풍화작용이다.
365일 24시간 내내 나의 심장소리와 두근거림 식도부터 위와 장에 이르는 소화기의 움직임이 모두 다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퇴근을 하고 진이 빠진 채로 거실에 누워 조여오는 듯한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나는 "아, 정말 이대로는 못하겠어."라고 조용히 내뱉었었다. 그게 7년 전의 일이다. 무얼 못하겠다는 것이었을까.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무심코 뱉어버렸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간에 나는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았고 이대로 못하겠다고 얘기해버린 것 치곤 꽤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았다. 무너지고 울고불고 좌절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여전히 살고 있고 여전히 해내고 있다. 나는 그걸 기억하려고 한다.
불안에 대한 에세이를 쓴 것은 전적으로 나를 위해서였다. 미셀 세르의 말처럼 '어떤 것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부담에서 우리를 자유롭게'해준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할 때보다 무엇에 대해 쓸 때 그것이 자기와 더 분리되었다고 느낀다고 한다. 말은 사라지지만 쓴 것은 객관적 대상으로서 내 앞에 존재하기 떄문이다. "나비가 번데기 껍질을 벗듯이 내가 쓴 것은 벗어놓은 낡은 옷가지들처럼 내 앞에 놓여있으므로 나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과 이별하는 일도 한창 쉬워진다." (김경희/진은영, 『문학, 내 마음의 무늬읽기』,엑스북스, 88쪽) 나는 이제 바닷가 모래사장에 놓인, 제법 무거워 아직 한 손으로 들고 옮기기는 살짝 버거운, 둥근 돌멩이 모양이 된 나의 불안과 이런 관계를 맺어보기를 바랐다. 쓰기라는 세계 안에서 내 삶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그 자장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며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한 안전한 글쓰기를 하고자 했다. 나는 나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만 써 내려가는 '슬픈저자'에 머무르지 않고 내가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았었는지, 그것과 함께 무슨 일을 겪었었는지, 거기에서 무엇을 배웠었는지, 심지어 그 안에서 어떤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또 발명해내기도 했었는지에 대해 쓰며 '진지한 저자'가 되고자 했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책세상, 309쪽)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란 글쓰기가 삶에서 늘 중요한 과정이자 분기점이었다는 것이다. 내게 일어난 일을 내가 납득할만한 나의 언어로 재서술하는 것. 그걸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그것들로부터 상당부분 자유로워지곤 했다. 불안으로부터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 또한 그럴 것이라고. 나는 감히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