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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Feb 12. 2018

새 학기를 앞두고

새 학기를 앞두고 


아직 바람은 차다. 그래도 봄기운은 미세하게 공기 사이를 맴돈다. 1학년 담임 선생님들의 마지막 회식이 있었다. 가는 길에 눈발이 날렸다. 봄은 여전히 먼 모양이다.


3월이 되기 전 이런저런 새 학년의 준비를 해 본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런 식의 준비는 늘 있었을 것이다. 


오고 가면서 잠시 해 본 생각을 옮겨 본다.


매년 선생으로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바르게, 착하게, 성실하게, 진실하게” 등의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단 한 번도 남을 속이라거나 기회를 엿보라거나 때론 삐딱하게 살라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선생이니까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믿고 있었고 또 여지없이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생인 내가 한 그 말들 중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거짓이거나 또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이 각박하고 험난한 세상에 과연 바르고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인가? 이 비열하고 치졸한 세상에 과연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물론 여전히 좋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일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쉽게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는데 선생인 나는 여전히 “바르게, 착하게, 성실하게, 진실하게”를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옳다’라고 하는 것과 ‘틀리다’라고 하는 절대 기준이 없다고 늘 생각하는 편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월에 의해 굳어지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어떤 기준들을 우리는 도덕이나 윤리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도 매우 위험한 요소가 숨어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하는 그 원칙은 누군가에 의해 지켜질 때 가능한데 그 원칙을 지키는 일은 사실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지키는 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다. 동전의 앞 뒷면처럼 두 개의 상반된 사실이 붙어있는 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세상의 모습이다.


대개 합의에 의해 정해졌다고 이야기하는 많은 윤리와 도덕, 법률들 속에 그것을 지켜야 할 사람들의 의지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조차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그것을 지켜야 할 사람들의 합의는 그 속에 없을 때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지켜야 할 사람들의 자유의지와 일반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거나 또는 완전히 반대되는 합의도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선생으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그 말들은 분명히 나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의지이며 좀 더 크게는 국가의 의지인 셈이다. 국가가 의도하고 그리고 사회가 의도하는, 좀 더 작게는 가정에서 가장이나 부모가 의도하는 “바르게, 착하게, 성실하게, 진실하게”는 대부분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과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이 많다.


신학기를 맞이하면서 지금까지 관행처럼 해 왔던 모든 일들을 의심해보고 검토해 본다. 아이들에게 내가 한 대부분은 ‘금지’이거나 ‘강요’였다. ‘설득’이나 ‘배려’가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작아서 아마도 아이들은 그것을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새 학년을 맞이하고 또 학교를 떠났을 것이다. 지나간 일은 대부분 아름답기 때문에 아이들은 험하고 고통스러웠던 나와의 과거를 아름답게 가공하여 추억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졸업 후 나를 만나면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태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스스로 우쭐해하면서 나의 방식과 나의 교육을 맹신하였을 것이다. 늘 자신에게 다가오는 대부분의 것들을 의심하며 살아온 내가, 왜 이 간단한 것들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당장 3월부터 이런 금지와 강요, “바르게, 착하게, 성실하게, 진실하게”를 외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어쩌면 앞으로 6-7년 정도 남은 나의 교직 생활 내내 그 이야기를 외치면서 교직을 끝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의심하기 시작했으므로 달라질 가능성은 열게 되었다. 하지만 걱정이다. 50대 후반의 반성은 사실 그리 뼈아프지 않고 동시에 검불처럼 가볍기조차 하다. 어쩌면 3월 신학기가 오기도 전에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늘, 지금이 순간 분명하게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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