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분투

6

by 고성프리맨

다음날 새로운 회사에 대한 설렘을 가진 상태로 지누를 만나러 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마음이 편하고 공유 오피스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미팅에 늦는 건 좀 그래서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저번에 로비를 보니 시리얼이 준비 돼 있어서 먹고 싶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 기다리며 먹을 생각을 한다. 로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꽤나 많은 사람이 있다. 늘 사무실에만 지내서인가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시리얼을 다 먹을 즈음해서 우연히 대표가 나타났다.


“어? 일찍 오셨네요! 연락 주시지 그랬어요.”

“아..”


다 먹은 시리얼 그릇을 보며 괜히 민망해진다. 내 시선을 따라 대표도 살펴보더니 웃는다.


“여기 시리얼 맛집이에요. 하하.”

“시리얼을 보니까 조금 출출해서 한 그릇 먹었어요. 맛있네요.”

“좀 더 드세요.”

“아니에요.”

“제가 화장실 가던 중이라 그럼 갔다 와서 얘기 나눌까요?”

“네 괜히 바쁜데 일찍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어차피 동선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요. 그럼.”


그렇게 10분 정도 일찍 지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저희 회사로 마음을 굳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제가 더 감사해요.”

“일단 간단하게 회사 업무 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입사하실 때 여러 가지 마음의 준비도 하셔야 할 거 같아서 미리 알려드리면 좋을 거 같았어요.”

“아. 네네.”


‘입사하기 전인데 벌써부터 압박을..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한동안 지누는 혼자 신나서 얘기를 했다. 말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벌써 20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나저나 연봉 얘기부터 정해야 하는데. 아직 다 정해진 게 아닌데.’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말이 없어진 나를 본다.


“아.. 저 혼자 신나서 너무 말이 많았네요. 하하. 같이 일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이 많을 거 같아서 설렜어요.”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구현해야 할 아이디어가 산적해 있어서요. 아참 연봉 얘기도 마무리 지어야죠. 제가 좀 더 조정할 수 있는 안을 준비해 왔는데 한 번 읽어 보시고 의견 주시겠어요?”

“네. 그럼 잠시 읽어 보겠습니다.”


‘오? 연봉을 이전 직장이랑 동일하게 맞춰 주는 걸로 바꿨네? 지분이 줄어드는 건가.’


꼼꼼히 내용을 읽는 중에 대표가 말한다.


“저희가 정말 큰 도전과 결심을 했습니다. 아직 자리 잡은 사규가 없었지만 선호님을 잡으려면 연봉은 올려드리지는 못해도 유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지분에 대한 비율도 줄이지 않았는데 조금 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좋습니다. 사실 연봉이라는 게 자존심 같은 문제라 그리고 좀 더 현실적으로는 생활에 직결된 거다 보니 고민이 늘 되긴 합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이 정도로 절 생각하고 맞춰주신다면 저도 기대에 부응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효석 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저희가 님 호칭을 붙이고 있어요 선호님.”

“저도 잘 부탁드려요 효석 님.”


잘한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직할 곳이 생겼다는 게 마음을 조금 더 여유롭게 만들었다. 물론 100% 마음에 드는 회사는 아니다. 연봉도 올리지 못했고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작은 회사일뿐이다. 하지만 힘든 코딩테스트를 준비하기도 그렇고 지금 주어진 새로운 일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싶어졌다.



“제프. 이직 축하해요.”

“고마워요 션. 션은 최종 합격됐어요?”

“거의 될 거 같아요. 기술 면접 통과했고 임원 면접도 다 봤으니 이제 기다려야죠 뭐. 저보다 먼저 나가실 줄은 몰랐어요.”

“같이 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또 모르죠. 제가 먼저 자리 잡고 있을 테니 나중에 연락 주세요. 추천해 드릴게요.”

“네.”


션을 비롯해 친했던 그리고 안면이 있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6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나오게 됐다. 엘리베이터에 서서 마중 나온 동료들을 바라보다 슬퍼졌다. 팀장과 부서장은 가볍게 인사만 할 뿐 마중 나오지도 않았다. 굳이 볼 일 없다 이건가. 내 것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잊혀 버렸다. 내가 앉아 일하던 자리도 결국 새로운 누군가가 차지하게 되겠지. 1층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서자 퇴사에 대한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떠나는구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회사로 출근인데 긴장이 많이 된다. 아내는 여전히 내 결정에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어쩔 수 없이 아내도 허락했다.


‘오늘은 서점이나 좀 들러야겠어.’


출근 전까지 부족한 기술에 대해 공부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공부한다고 갑자기 좋아지진 않겠지만 이번엔 좀 중장기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계발을 해볼 생각이다. 새로운 팀원들하고 인간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 세대차이 때문에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렵다.



공유오피스에서 일해본 경험은 없다. 시간이 참 금방 간다. 평소 습관처럼 출근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이전 회사에서 먹던 아침밥이 벌써 그립다. 그나마 시리얼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로비에 앉아 흡입한다. 다 먹고 나서 효석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아! 오늘 출근이시죠? 제가 비번 보내드릴 테니 혹시나 출근하신 분 없으면 먼저 들어가 있으시면 되세요. 장비는 전에 요청 주셨던 대로 주문해 놨으니 뜯어서 세팅하시면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공유 오피스 내부로 들어가 회사가 자리 잡은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가자 굉장히 비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창문 하나 없이 다닥다닥 붙어서 일해야 하는 공간. 예전과 비교해 상당히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에 불쾌함이 살짝 드러났다. 한쪽 책상 위에는 짐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창고처럼 쓰는 거 같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살펴보는 데 빈자리에 [선호님]이라고 쓰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포장된 노트북이 올려져 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풀고 있으니 누군가 들어온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입사한 선호라고 합니다.”

“아 네에. 전 진선이에요. 기획을 맡고 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효석을 비롯한 전 직원이 출근해 있었다. 효석이 나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건넨다.


“자자 여러분! 오늘부로 새로 합류하신 선호님께 박수 부탁드려요. 저희에게 가장 필요한 시니어 엔지니어시고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서비스를 만드는 데 큰 기여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환영합니다.”


이 친구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끝마쳤다. 그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함이 찾아왔다. 다들 바쁜지 키보드 소리만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뭘 해야 하는 거지?’


노트북을 뜯고 일단 설정을 먼저 해 봐야겠다 싶었다. 어느샌가 효석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턱 얹는다.


“첫날이라 정신없으시죠?”

“그러네요. 뭐부터 해야 할지 하하.”

“일은 차차 찾아가실 텐데 그 시간이 길어지면 안 될 거예요.”

“아.. 네에.”

“저희가 서비스 출시일을 3달 뒤로 잡았는데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요. 요즘 다 같이 크런치 모드로 3주째 일하다 보니 다들 체력이 많이 방전된 상태예요.”


‘크런치 모드? 게임 회사에서나 하는 업무 형태 아니야? 나보고 야근하라는 뜻인 거겠지?’


“아.. 출시일이 빠듯하네요.”

“네 투자자가 원하는 기간이라서. 죄송하지만 빨리 적응해 주셔야 될 거 같아요 선호님이. 궁금한 건 옆에 동료들한테 물어보시고 제가 미리 보내드렸던 기획서 보시면서 개발할 수 있는 베이스부터 개발 시작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몰아치자 덜컥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개발이 돼있는 걸까 싶어 옆에 있는 동료한테 물어봤다.


“개발은 좀 많이 진행됐나요?”

“네? 아. 저희 회사 첫 번째 개발자가 선호님이신데.”

“어?”

“이제부터 개발 시작하시면 될 거예요. 기획서는 사실 거의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상태거든요. 물론 저희가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서 기능이 정말 많긴 한데 일단 최대한 줄여서 1차 서비스 오픈하는 게 목표예요.”


‘개발자가 한 명도 없는 회사구나.. 전혀 몰랐는데.’


혼자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압박감으로 느껴지며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 점심은 다들 시켜 먹는 분위기여서 덩달아 같이 시켰다. 어떻게 보면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는 거 같지만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듯도 하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바뀐 처지에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자꾸 예전이 그리워진다.



“선호님. 잠깐 회의하실까요?”

“네 가시죠 효석 님.”


효석은 마음이 급해 보였다.


“오늘 어떤 업무를 주로 하셨나요?”

“크게 진행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일단 공유 주신 기획서를 보며 어떻게 개발해야 할지 방향을 좀 정리 중이었습니다.”

“아직 분석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어떻게 개발이 가능하실 거 같습니까?”

“솔직히 얘기드리면 저 말고 다른 개발자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혼자라고 해서 조금 당황하긴 했습니다.”

“네 미리 얘기드리지 못했습니다. 속이려는 건 아니었고 저희 규모를 보시면 알겠지만 각자가 다 다른 영역을 맡아서 일하는 구조라. 그리고 본업 외에도 다른 일까지 찾아가며 하고 있다는 걸 얘기드리고 싶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이니 이해합니다. 일단 출시일까지 기간이 촉박하다 보니 기획서에 있는 모든 기능을 다 만들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잘 산정해 봐야 할 거 같고 필수 기능에 대해서 빨리 파악해야 할 거 같아요.”

“혹시 그 부분은 선호님이 진선 님하고 정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전 모든 기능이 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테니까요. 1차적으로 정리를 좀 해주셨으면 하는데 혹시 내일까지는 좀 힘들겠죠?”


‘아.. 오늘이 첫날인데.’


첫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효석 님. 아무래도 기획서의 양이 좀 있으니 제가 오늘 집에 가서도 한 번 정리를 좀 하고 내일부터 3일 정도 시간을 주시면 진선 님하고 1차 개발 범위를 정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효석 님 참석 하에 최종적으로 승인해 주시면 그 방향으로 빠르게 개발할 수 있는 기간을 산정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3일이군요. 흠. 알겠습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첫날이니까 좀 먼저 가셔야겠죠?”

“꼭 그런 건 아닌데 오늘 가족하고 축하파티를 좀 하고 싶었거든요. 아내도 곧 복직이라 앞으로 서로 바빠지면 잘 보지도 못할 거 같고 해서.”


결혼하지 않은 효석은 잘 이해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앉는다. 오히려 퇴근 시간이 되니 다들 뭔가를 더 보여주겠다는 듯 경쟁적으로 그에 맞춰 신경질적인 키보드 치는 소리가 사무실 가득 울린다. 말을 꺼내도 될까 잠시의 고민 끝에 결정했다.


“오늘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선호님. 내일 봬요.”

“안녕히 가세요.”


효석을 비롯한 직원들의 영혼 없는 형식적인 인사에 떠밀리듯 퇴근을 했다.


‘좀 더 남아 있을 걸 그랬나? 아니야. 딱 보니까 앞으로도 일복이 터진 거 같은데. 첫날이라도 일찍 가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선택이다. 이제 와서 아쉬워하고 후회하면 뭘 하나. 대신 다들 일은 좋아하는 거 같으니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맞지 않을까? 그래도 개발자가 나 혼자인 건 위험하다. 솔직히 혼자서 다해낼 수는 있는 걸까? 아직 정확한 기획 범위를 다 보진 못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양이 상당했다. 오늘 집에 가서 기획서를 좀 더 꼼꼼히 봐야겠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인력 충원이 필요해 보이는데 이 부분은 효석과 상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일찍 왔네 김서방. 식사해야지?”

“고생 많으셨어요. 희수 때문에 힘드셨죠?”

“힘들긴 하지. 근데 얘가 웃을 때마다 어찌나 이쁜지. 밥 차려줄게.”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세요.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이미 반찬도 다 만들어 주셨는데.”

“그래. 그럼 갈게. 내일은 야근해?”

“아마도 그럴 거 같은데요.”


야근이라는 말을 하며 쓴웃음이 지어진다.


“에휴. 다들 고생이다 정말. 옮긴 회사는 어떻게 다닐만해?”

“아직 모르겠어요.”

“뭐 하는 회사라고 했지? 아휴 아니다. 자꾸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갈게 김서방. 지은이한테 이따 전화하라고 하고.”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내도 복직하고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정시퇴근이 가능한 직장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희수는 어린이집에 가고 오후 시간에는 장모님께서 봐주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양육을 할 수 있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어디야?”

“30분 정도 뒤면 도착할 거 같아. 엄마는 갔어?”

“응. 방금 가셨어.”

“오늘 그래도 일찍 왔네.”

“첫날인데 이것도 앞으로 힘들 거 같아.”

“에휴. 육아는 다시 기대도 못하겠구먼.”

“미안해. 당신하고 장모님한테 면목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한테 잘하라고. 나중에도 은혜 꼭 잊지 말고. 알겠어?”

“알았다니까.”

“저녁 뭐 사갈까?”

“아냐. 장모님이 반찬 많이 해놓으셨던데 그거 먹자.”

“알았어. 맥주만 사갈게 그럼.”

“응 조심해서 와.”


갑자기 희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뛰어가서 희수를 들고 엉덩이 냄새를 맡아본다.


‘지렸구나..’


문득 날마다 아내가 해왔을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저귀를 가는 김에 오랜만에 샤워를 시켜주기로 맘먹었다.


‘욕조가 어디 있더라..’


얼마 만에 씻기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들어왔을 때 이런 모습을 보고 흐뭇해할 아내 생각을 해본다.



“웬일이야? 평상시 하지도 않던 목욕도 시키고. 진작에 그랬어야지.”

“그러게 말이다. 근데 앞으로 바빠지면 평일에는 꿈도 못 꿀 거 같은데..”

“왜.. 벌써부터 눈치 보여 회사에?”

“당연하지. 적응해야 하잖아. 근데 조금 무섭다.”

“뭐가?”

“개발자가 나 한 명이더라고.”

“잘 알아보지 그랬어. 앞으로 일에 치여 살겠네. 근데 웃기다. 이럴 거였으면 연봉도 당연히 더 많이 올렸어야 하는 거 아냐?”

“이미 정해진 걸 바꿀 수는 없고.. 나도 이럴 줄 몰랐으니까.”

“다닐 거지?”

“그래야지. 나 밥 다 먹었으니 이제 일 좀 해야겠다. 설거지 부탁할게.”

“알았어.”


방에 들어와 노트북을 켜고 기획서를 열었다. 예전 문서 형태로 만들어 놨으면 보기라도 편했을 거 같은데 새로운 시도를 해서 복잡하고 한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휴.. 내가 맞춰야지 뭐.’


그렇게 기획서를 보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되었다.


‘이거야 원. 첫날부터 야근했네. 휴.’


불길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기획서의 양으로 봐서는 도저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은 기간은 3달이 채 되지 않는다. 사람을 뽑는다 쳐도 바로 뽑지도 못할 게 뻔하고 혼자 할 수 있는 개발은 제한적이니 선택이 필요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내일 효석과 결정지어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본다. 크게는 2가지 주제로 정리하려 한다.


1. 1차 개발 범위 논의

2. 개발 인력 충원


두 가지 중 하나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무조건 개발 기간을 확보해야 한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늘 해왔던 일이지만 처음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로 찍히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효석 님 기획서 분석을 좀 해봤는데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본 내용을 토대로 회의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근데 제가 바로는 안될 거 같고 1시간 후에 괜찮을 거 같아요.”

“네 그럼 미리 회의실 잡아 놓겠습니다.”


기획자인 진선에게 잠시 티타임을 요청했다. 약간 떫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수락한다. 진선은 어제 늦게까지 일했는지 오늘도 상당히 지쳐 보인다.


“어제 늦게까지 일하셨어요?”

“네 뭐 그냥 그렇죠. 집에 도착하니 12시였던 거 같아요.”

“고생하셨네요. 사실 저도 어제 집에서 기획서 분석하느라 보다 보니 12시가 훌쩍 넘어버리더라고요 하하.”

“기획서 내용은 어땠어요?”

“음.. 양식은 익숙하지 않아서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긴 했는데 앞으로 적응해야겠더라고요.”


기획서 양식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진선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기분이 나빴으려나.


“그건 저도 써보고 싶었던 툴이 있어서 그랬어요. 혹시 앞으로 개선점 보이면 얘기 주세요. 그럼 그런 부분도 변경 적용해 볼게요 선호님.”

“아.. 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일단 개발해야 할 범위가 너무 많더라고요.”

“그건 맞아요. 저도 기획하면서 이걸 다 개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거든요. 효석 님이 좀 많은 걸 한 번에 보여주고 싶어 하다 보니. 경쟁사가 몇 개 있는데 거기보다 후발 주자면서 기능도 부족하면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획의 의도를 바꾸자는 건 아니고요. 그냥 개발자가 저 한 명인데 제가 정말 3달 안에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지 않으면 론칭은 실패할 거 같아 걱정이 되더라고요.”

“휴.. 그렇죠. 일단 개발 범위는 저하고 한 번 같이 잘 정해 보시죠. 대신 1차에 꼭 필요한 필수 기능이 있어야 하긴 해서 그게 좀 걱정이긴 해요. 그래도 서비스가 갖춰야 할 기본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네에. 기획서 양이 어마어마하던데 작성하는 데 오래 걸리셨겠어요?”

“저도 입사한 지 이제 3개월 밖에 안되긴 했어요. 그냥 갈아 넣은 거죠.”


진선의 표정이 슬퍼 보인다.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아무튼 론칭이 돼야 투자금이 들어올 거고 그래야 인력 충원도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지금 혼자 기획하고 정리하는 게 한계치에 다다랐거든요.”


거짓말이 아닌 거 같다. 퀭해져 있는 진선의 모습이 앞으로의 내 모습처럼 보여서 마음이 흐려진다.


“같이 있었네요. 선호님 혹시 진선님도 같이 회의 참석해도 괜찮나요?”

“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두 분 다 함께 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갈까요?”



회의실에서 내가 준비해 온 내용을 얘기하고 현실적인 계획 수립에 대한 이야기를 정하자고 했다. 회의실 분위기는 침울해져 있었다.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선호님을 모신 건데. 너무 방어적이신 거 아닌가요?”

“네?”


‘뭐라는 거야.’


“진선님이 함께 있어서 좀 그렇지만 어느 정도 아실 거니 얘기할게요. 여기서 가장 고연봉자가 선호님이에요. 사실 제가 직함은 CEO지만 현재 가져가는 돈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나중에 성공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제가 가져갈 수 있는 게 여기 계신 분들 보다는 당연히 더 많아지겠죠. 첫날부터 얘기드린 것처럼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영역 그리고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할 때 비로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알고 있어요 효석 님. 제 얘기는.. 아무리 야근을 하고 해도 현실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양이라는 게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저도 제가 해온 일 대비해서 어느 정도 시간 측정이 가능한데 새롭게 만드는 과정은 특히 더 중요하고 공들여야 할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 점을 좀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효석은 그런 내 말에 답변도 하지 않고 진선에게 말을 건넨다.


“진선님. 우리가 1차로 계획한 범주를 더 줄이는 거에 동의하시나요?”

“네? 음. 솔직히 개발자는 선호님이고 저희 중에 가장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실 수 있으니.. 물론 저야 전부 다 개발이 가능하다면 가장 좋긴 하겠지만요.”

“휴.. 어렵네요. 일단 오늘 두 분이서 1차 개발 가능 범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정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3달 안에 론칭이 가능하다를 전제로 해주시고요. 그리고 내일 안으로 최종 판단을 내리겠습니다. 효석 님도 힘드시겠지만 투자를 못 받으면 회사가 침몰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최대한 책임감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내가 책임감이 없다는 건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감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되받아친다.


“알겠습니다 효석 님. 제가 지금 회사로 이직 결정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 않았음을 알아주세요. 제겐 지켜야 할 가족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명확히 있으니까요. 책임감 없이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계획으로 정확히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효석의 표정은 나빠져 간다.


‘그만 말해야겠다.’


“네.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이제야 겨우 론칭에 대한 희망이 생겼는데 다들 힘내서 꼭 회사를 키웁시다. 좋은 결과로 대화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들 일하러 갈까요?”

“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갑갑한 상황이다. 말로는 열려 있다고 했지만 효석은 이미 정해진 방향이 있고 그거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접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난 거짓말쟁이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


keyword
이전 05화구조조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