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퇴사?

7

by 고성프리맨

회의를 마친 후 연이어 진선과 1차 개발 범위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 안으로 무조건 다 정리 끝마치죠. 선호님이 아직 잘 모르겠지만 효석 님 생각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철저하게 저희끼리 입을 맞춰 놔야 겨우 설득이 가능할 거예요.”

“그 정도군요.. 근데 이건 분량만 봐도 혼자서 못할 거라는 걸 알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을 알려주려면 선호님이 무조건 설득될 때까지 설명해 주셔야 해요. 여기 선호님만큼 전문가가 없어요.”

“휴.. 알겠습니다.”


속이 꽉 막히는 듯했지만 그나마 기획자가 말이 통한다. 물론 방심해서는 안된다. 예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기획자와 한 순간에 사이가 틀어졌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최대한 맞춰가면서 일을 했었는데 나중에 딱 한 번 못하겠다고 하자 그대로 사이가 나빠졌었다. 일단 지금 회사에 계속 다니려면 무조건 개발 범위를 줄여야 한다. 사업적인 구상이나 계획? 그런 건 난 모르겠다. 일단 개발을 할 수 있는 상황만 생각하자 무조건.


우리는 그렇게 점심 식사도 걸러가며 장장 4시간 동안의 긴 회의를 끝으로 겨우 1차 범위를 정리했다. 물론 서로가 한 두 발자국 정도는 양보한 셈이다.


“이 기능은 1차에 꼭 포함돼야 하는데요?”

“음. 있으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굳이 포함 안 시켜도 잘 모르지 않을까요? 이런 기능은 보기랑 다르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좀 많아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거든요. 티도 별로 안 나면서.”

“선호님은 티가 나는 부분만 개발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아니고 제가 다른 서비스 하나 보여드릴게요. 자 이곳인데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기능을 복잡하지 않게 단순화시켰는데 괜찮죠?”

“음.. 그렇긴 한데. 알겠어요. 그럼 2차 범위로 뺄게요. 그때는 꼭 가능하게 해 주실 수 있죠?”

“네. 개발 일정이 어떻게 잡히냐에 달려 있지만.”


옥신각신 끝에 그래도 1차 개발 범위를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만 해도 3달 안에 몽땅 개발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없다. 주말까지 일을 풀로 해야 겨우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우리 30분만 쉬고 효석 님하고 다시 회의할까요?”

“네 고생하셨어요 선호님. 그래도 개발자가 있어서 다행인 거 같아요. 저 혼자서는 설득력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기획이라도 있으니 이렇게 범위에 대한 논의라도 할 수 있는 거겠죠. 제가 효석 님께 메시지 보내 놓을게요.”


[효석 님. 30분 뒤 회의실에서 1차 개발 범위 관련해 얘기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네. 30분 뒤라면 괜찮습니다. 좀 이따 뵐게요.]


문득 출근한 지 2일밖에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년은 다닌 기분이네..’


이상하게 마음속에서는 계속 찝찝함이 생기고 있었다. 뭐 때문인지 떠올려 보려 해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인 듯하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회의실에서 효석을 앞에 두고 진선과 논의한 1차 개발 범위에 대해 설명을 끝마쳤다. 효석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다.


“저.. 효석 님. 괜찮으신가요?”

“음..”


여전히 눈은 뜨지 않고 있다.


“말을 해주셔야..”


아까부터 진선은 불안한 듯 자세를 계속 바꾸며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정리를 해보고 있었습니다. 일단 오늘 개발 범위 정하는 거에 앞서서 회사의 상황을 하나 공유드리겠습니다.”


괜히 무게를 잡아 무거워진 분위기 탓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든다.


“요즘 투자받기 어려운 시기라는 거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 회사가 아직 인원이 적지만 들어가는 고정비는 적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나마 공유 오피스는 2년 동안 지원받을 수 있어서 아직까지 월세가 발생하진 않는 상황이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모든 직원이 회사에 나오는 이유는 잘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건비를 마련하려면 투자 유치를 받아야만 합니다. 물론 일을 하는 이유가 인건비 벌 정도만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되겠죠. 앞으로 들어갈 투자 비용이 꽤나 많을 겁니다. 추가 인원도 생겨야 할 테고 이제 선호님 같은 개발자도 합류하셨으니 각종 고정비용은 추가로 더 들겠죠. 인원이 생기게 되면 사무실도 옮겨야 할 테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연봉 삭감이라도 하라는 말인 건가?’


얼마 전에 구조 조정을 당했던 일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말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아는 상태에서 지금의 개발 범위가 투자자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일까는 고민해 보셨습니까? 진선님부터 얘기해 보세요.”

“네? 아.. 그게.”

“갑작스럽겠지만 최대한 설명할 수 있는 만큼 말해보세요.”

“효석 님의 얘기가 어떤 말인지 100%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저 역시 회사를 키워 잘살고 싶은 꿈 때문에 왔는데 흐지부지 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선호 님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확실히 느낀 점도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선택이 필요하다는 걸요.”

“어떤 선택에 대한 건지?”

“선호님이 개발을 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요? 근데 제가 보기에도 지금 만들어 놓은 기획서대로 모든 걸 3달 안에 만들어내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 혼자시니까요. 물론 제 욕심으로는 선호님이랑 맞춘 계획보다도 더 추가적인 개발을 해주신다면 더없이 좋긴 하겠지만요.”


은근슬쩍 내 탓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결국 개발자인 내가 못하겠다고 하니 도리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서 말해도 타깃은 나구나.


“그럼. 진선님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획한 내용을 양보했다는 거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맞습니다.”

“선호님.”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개발해야 할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걸요. 하지만 스타트업이라는 게 원래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려고 모이는 곳 아닐까요?”

“효석 님..”

“네 말하세요.”

“제가 불만을 말하며 일을 하기 싫어서 이렇게 얘기드리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현실적인 상황에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 짓지 않고 무조건 할 수 있다고만 하는 건 더 큰 문제를 만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큰 문제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오지랖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할 수 있다 해놓고 몇 달 동안 월급만 받아가다 막상 기간이 닥쳤을 때 결과물을 못 내놓는다면 결국 누가 더 손해일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저야 일한 시간만큼 월급을 받겠죠. 하지만 회사가 받을 타격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정해진 계획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결국 비용만 쓰며 투자 유치까지 멀어지겠죠. 전 그게 더 큰 문제인 거 같습니다.”


너무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나 싶어 효석의 눈치를 슬그머니 봤다. 무표정한 효석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계속 얘기해 주세요.”

“다시 개발 일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얘기를 드리자면 전 3달 동안 주말까지 일한 다를 가정해서 일정을 잡았습니다. 물론 평일도 야근을 해야겠죠. 그렇게 했을 때 실제로 만들어 낼 수 있을만한 범위 그것도 겨우 간당간당하게 할 수 있을 범위를 1차 범위로 잡았을 뿐입니다. 물론 모든 기본 기능이 있어야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가 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을 어떻게 늘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해보셨을까요?”

“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숨도 잘 안 쉬어지는 거 같고 갑갑할 뿐이다.


“제가 보니 선호님은 못한다라는 말을 뒷받침할 핑계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네요. 만약 접근을 개발을 다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할 수 있습니다란 내용으로 오늘 대화가 진행됐다면 어땠을까 싶어 아쉬움이 생기네요.”

“그게. 휴. 제 능력이 그 정도인가 봅니다.”

“자기 비하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전 어떻게든 기획서 내용대로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하얘져간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 그만둬야 할 거 같네요.”

“뭐라고요?”


나도 모르는 새 마음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찝찝함의 정체는 바로 효석과 내가 결이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터질 거라는 걸 느끼고 있었나 보다. 단지 좀 더 일찍 폭탄이 터진 것뿐이리라. 차라리 잘된 거 아닐까?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순간적으로 홀가분해졌다.


“무책임한 사람이었네요. 그런 생각으로 입사하신 거예요? 힘들면 퇴사하겠다는 안일한 생각. 가족을 지키시겠다던 그런 말도 다 거짓말이었군요.”

“네. 다 맞습니다. 그만 갈게요. 다른 분 뽑으세요.”


말리려는 효석과 진선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짐을 챙긴다.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다. 솔직히 지금처럼 일정에 대해 협상조차 되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


‘똥 밟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회사는 다시 구하면 되지. 지은이한테는 뭐라고 하지.. 아냐 설명해야지. 어쩔 수 없었어.’


짐을 싸서 나가려는 데 진선이 다가왔다.


“잠깐만 시간 내주실 수 있어요?”


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짐 싸는 내 모습과 진선의 만류하는 모습을 보고 짐작하는 바가 있는 듯 다들 조용히 있었다.


“네 잠깐 가시죠. 효석 님은요?”

“잠깐 바람 쐬러 갔다 온다고 하셨어요.”


‘내가 너무했나.. 아무리 그래도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조금 더 이해했어야 하려나.’


하지만 이해만으로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명확히 얘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최선이었다.


“선호님. 꼭 가셔야겠어요?”

“진선님도 보셨잖아요. 무조건 다해야 한다고만 하는데. 대책이 없잖아요.”

“선호님이 그래서 설득하는 역할을 해주셔야 해요. 경력이 가장 많은 선호님 의견에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 의견에 어땠을지 상상이 되시지 않나요?”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매번 지금처럼 힘들게 설득과 싸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타협만 생길 거잖아요.”

“알아요. 사실 저도 다닌 지 1주일 됐을 때 퇴사하려고 했는데.”

“안 하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건가? 조금만 더 진선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제가 원래 공기업 다녔었거든요.”

“공기업이면 왜 그만두셨어요?”

“제가 보기랑 다르게 사업에 관심이 좀 있어요. 근데 공기업 다니면서 투잡을 뛰는 게 금지돼 있거든요. 어떻게든 명의를 부모님으로 하고 몰래 할 수는 있는데 집중해서 할 수가 없어서요.”


‘사업한다고 자랑하는 건가? 이 얘기를 왜 굳이 나한테 하는 거지.’


“그런데 진선님이 사업하는 거랑 저를 붙잡는 이유에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아.. 그렇죠. 효석 님은 원래 공기업에 재직 중일 때 클라이언트로 만났었어요. 회사 창업 전에 부모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효석 님의 부모님도 사업을 하신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지금 뭔가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좀 의아하시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아직 개발도 된 게 없었고 사업계획이 실현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효석 님이 나이가 많지도 않잖아요.”

“그렇네요.”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회사 투자금은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어차피 어떻게든 될 수 있게 만들 자금은 수혈할 수 있어요.”

“근데 왜 이렇게 빡빡하게 일정을 잡고 론칭하려고 하는 걸까요?”

“부모님에게 성과를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생각해요. 아 물론 제가 직접 듣거나 그런 건 아니라 추측성인 얘기예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효석 님한테 그만둔다고 얘기를 했었어요.”

“그때는 직원이 겨우 저 포함해서 3명밖에 없던 때였는데. 절 붙잡더라고요. 그리고 회사가 잘 안 될 경우 부모님 회사에 인수합병 형태로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그리고 제게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물어보더라고요.”


‘듣고 싶은 말이 아닌데 휴.. 그래도 일단 들어나 보자.’


말이 길어지는 게 느껴졌는지 진선은 잠시 내 눈치를 살핀다.


“얘기 조금만 더 이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다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무튼 제가 사업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이야 회사가 바쁘지만 나중에 커지고 나면 얼마든지 겸업해도 괜찮다고. 여력이 되면 사내 창업도 지원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으시나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일 뿐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긴 하죠. 제가 생각할 때 이런 작은 스타트업으로 오는 분들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이유가 있어 보였나요?”

“네. 당연하죠. 절실해 보이셨거든요.”

“그거야 가족이 있으니까요.”

“선호님이 조금만 노력하면 지금 회사보다는 훨씬 나은 회사로 취업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근데 언제까지 직장인으로 사실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전 직장인이 좋아요. 그리고 지금 하는 일도 너무 사랑하고요. 제가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이 일을 더 잘하고 싶고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아직은.”

“그러시군요. 전 분명 선호님도 사업에 꿈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떤 의미로 하신 얘긴지는 이해해요. 근데 전 사업 같은 거 해본 적도 없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죠.”


진선의 얼굴에 쓴웃음일지 비웃음일지 모를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고 절 붙잡으려면 솔직히 효석 님이 와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보세요. 이것만 봐도 전 진선님처럼 대우받기는 글렀어요.”

“제가 괜한 얘기를 했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는 진선님이 부러워요. 전 당장 이번달부터라도 돈이 안 벌리면 큰일 나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조금 더 여유 있는 곳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가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잘 지내세요.”

“안녕히 가세요.”


진선은 내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남은 짐을 다시 다 챙겨서 엘리베이터로 나올 동안까지도 효석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냥 가라는 뜻인가.’


그래도 문자정도는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효석 님과 함께 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좋은 인재 채용하셔서 좋은 서비스 출시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문자를 보내고 때마침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두 번이나 회사를 그만뒀다. 한 번은 타의에 의해, 이번엔 자의로.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오늘 결정한 내용을 아내에겐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집으로 가면 장모님이 계실 테니 이대로 돌아가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집 근처로는 가 있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동네에 와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집 외에는 갈 곳이라곤 없었다. 그저 회사와 집만 오고 가는 생활을 했을 뿐이니.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이룬 게 많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면 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뭘 위해 살아온 걸까? 생각이 많아지자 가슴이 갑갑해진다.


‘PC방이라도 가서 지원이라도 하자.’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갈 곳이라곤 PC방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백수가 되고 나니 회사를 구하는 것만 머릿속에 꽉 차있다.


‘몇 년 만에 온 PC방이지.’


예전과는 다르게 이것저것 새로운 시스템이 꽤나 보였다. 어떻게 결제를 하고 쓰는 건지 몰라 잠시동안 멍하니 있자 알바생이 다가왔다.


“혹시 처음 오세요?”

“아.. 네네. 몇 시간 이용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기 기계에서 선택을 먼저 하시고..”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으로 결제를 겨우 마치고 좌석으로 이동했다. IT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마치 문맹이 된 듯한 느낌이 신선하다. 흡연실도 분리되어 있어 예전의 불쾌했던 담배 쩐내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좋다.


‘생각보다 괜찮네.’


자리에 앉자 배가 살짝 고픈 느낌이 들어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싶었다. 화면에 보니 음식 주문할 수 있는 창이 떠져 있어 어렵지 않게 라면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채용 사이트에 접속해서 마지막에 작성한 이력서를 열었다. 수정한 지 얼마 안 된 이력서라 딱히 추가할 내용이 떠오르진 않는다. ‘내 나이대에 이직은 보통 인맥으로 많이 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친분도 좀 쌓고 그랬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움도 생긴다.


“라면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우울했던 기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보는 순간 살짝 좋아졌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 좋다고 하잖아.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긴 한데..’


걱정은 잠시 뒤로하고 라면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 거라곤 2군데 정도 이력서를 넣은 게 전부다. 최대한 많은 곳에 지원해 보고 싶은데 요구사항을 보는 순간 자신감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이라곤 관심도 안 가졌던 과거의 내가 한심할 따름이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공부를 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시간을 보니 아내가 집에 도착했을 법한 시간이다.


“어 오빠. 나 방금 집에 도착했어. 엄마랑 교대해줘야 하는데 좀 이따 전화해도 될까?”

“그래. 잘 교대해 드리고 좀이 따봐.”


조금만 더 있다가 집으로 가면 될 거 같다. 아내한테 솔직히 털어놓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분명 내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회사를 때려치운 걸로 트집 잡을 거 같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안 되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이야.’


짐을 싸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여전히 발걸음이 무겁다. 지금 들어가면 혹시나 장모님을 마주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으시겠지.



“어? 일찍 왔네.”

“응 그렇게 됐어. 장모님은 가셨어?”

“어 방금 전에 나갔는데. 혹시 못 만났어?”

“아. 옆 엘리베이터랑 엇갈렸나 보다. 인사도 못 드렸네.”

“혹시 아까 나한테 전화한 게 우리 엄마 있는지 체크한 거야?”


여자의 직감은 놀라울 정도로 무서울 때가 있다. 평소와 다른 행동 하나에서 찾아내다니. 내가 쭈뼛거리고 있자 아내가 말한다.


“뭔데? 오늘 회사 안 갔어?”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그만뒀구나?”

“어..”

“휴.. 어쩌려고 이래?”

“지은아! 내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한숨부터 쉬면.”

“조금 예상은 했어. 오빠 표정이 어제도 굉장히 안 좋았거든. 대책은 있어?”


생각보다 급하게 몰아붙이는 아내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하아. 나도 노력했어.”

“무슨 노력?”

“넌 진짜. 내가 돈으로 보여? 돈 벌어 오는 기계냐고 내가!”

“내가 언제 그런 말 한 적 있어? 괜한 자격지심 아니야? 그래서 이직할 때 신중하라고 그랬잖아. 근데 오빠가 귀찮아서 들어가기 편한 데로 이직한 거 아니야?”

“그래. 그래서 뭐 그게 잘못됐어? 나도 이제 마냥 젊지 않다고. 새롭게 뭘 배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알아?”


이렇게 치고받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는데. 서로가 쌓여 있던 게 결국 감정싸움으로 변했다. 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고 나면 결국 이 사람은 겨우 이 정도였구나 정도의 감정만 남는다. 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잘났어.”

“걱정 마. 나도 다시 취업 알아보는 중이니까.”

“알아서 해. 내일부터 엄마 보고 나오지 말라고 한다.”

“어?”

“어는 무슨 어야. 집에 있을 거잖아. 굳이 엄마보고 오라 가라 할 필요 없잖아.”


희수가 있다는 걸 순간 깜빡했다. 아이와 단둘이 있었던 적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전이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집에 있으면 당연히 애도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군말 말고 애 보면서 회사 알아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래.”


내일은 다른 회사로 이직한 이전 동료들한테도 연락을 좀 해봐야 할 거 같다. 최대한 빨리 괜찮은 곳으로 이직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건지. 호기롭게 회사를 나왔지만 결국 비참해지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아내의 전화소리가 벽을 타고 귀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장모님과 통화를 하는 거 같은데 내일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거 같은 기분이다. 이 집에서 내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아니지 희수는 내 편일까? 그러다 희수에게 해 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며 고개를 떨군다. 이 집에서 나의 위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차지한 사람. 더 이상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면 내 가치는 그날로 끝이다. 그게 이 집에 붙어 있는 유일한 내 삶의 이유라는 걸 느끼는 순간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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