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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

1. 여름

by 자민

엉엉 우는 여동생 손을 붙잡고 생전 처음 와보는, 먼지 풀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명색이 오빠라고 조금 참으려 했다 뿐이지 훌쩍이긴 마찬가지였다. 갓 열 살 좀 넘은 나이, 동생과 함께 무사히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꽤 긴장하고 있었다. 당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구리소년 사건이 있어, 인신매매단이 잡아간다고 길가에 봉고차만 서 있어도 피해 다니라고 하던 때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어느 일요일 낮, 아버지는 나와 동생 손을 붙잡고 아파트 공사현장을 찾았다. 우리도 곧 단칸방 신세를 벗어나 남들처럼 번듯한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며 아버지는 자못 들떠 있었다. 각자의 공간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나와 동생 역시 달뜨긴 마찬가지여서, 가는 길 내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기억은 안 나지만 별로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게다.


아파트는 시 외곽에 있었다. 산자락 앞에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 옆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회색 시멘트 블록 사이로는 수백여 장은 될 법한 초록색과 주황색 천이 제각기 나부꼈다. 지금 내 나이 또래인 젊은 아버지는 한 층 한 층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 전체가 마치 제 집인 양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동생이랑 정신없이 놀다 보니 아버지가 옆에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아버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곧 해도 저무는데 난생처음 와보는 곳에서 동생이랑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작정 큰길을 향해 바삐 걸었다. 아파트 현장은 외진 곳에 있어서, 차가 다니는 큰길까지는 삼십여 분 정도 걸어 나가야 했다. 동생 손을 붙잡고 같이 징징 짜면서 걸어 내려오는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이후로도 한동안 그 길을 걷는 꿈을 꾸곤 했다.


백 원 한 푼 없었지만 일단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갔다. 셋이 함께 나섰는데 애들만 들어오니 엄마는 난리가 났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파트 안쪽을 살펴보러 잠깐 단지에 들어간 사이 애들이 없어졌단다. 혹시 애들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 깜짝 놀라 그 동네 주변을 다 찾아보고 오느라 늦었다면서, 어떻게 큰길까지 나와 택시를 타고 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먼저 집에 가신 줄 알았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괜히 내가 일을 크게 만든 것 같아 실은 살짝 계면쩍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상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존재가 연기처럼 사라졌던 그날의 황망함이 기억 난다. 어린아이일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게 있다면, 그날 저녁 헐레벌떡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와 동생을 찾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것뿐.


그날 밤,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말할까 계속 고민했다.


‘한눈 팔지 말고 아빠 옆에 꼭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해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쑥스러워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여느 아빠와 아들 사이가 그렇듯, 대충 어물쩍 넘어갔다. 그로부터 스물 다섯 해 후, 임종도 채 못 보고 식어가는 아버지와 마주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면, 차라리 철없을 때 조금 더 용기를 낼 걸 그랬다. 아빠가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건지 미처 몰랐다고. 다시는 나와 동생을 떼 놓고 어디 가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이라도 한 번 더 할 걸 그랬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며 집 안팎을 왔다갔다하다 보니, 한때 새집 냄새 물씬 풍기던 그 아파트도 꽤나 많이 늙었다. 시간은 매정하게 흐르고, 흐릿해진 추억과 회한만 곁에 남았다.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짧은 유학생활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가 울먹이고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공항으로 뛰어가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직항이 없어 꼬박 하루가 걸렸고 아버지는 그 하루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부고를 들었다.


상주가 되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일하듯 상을 치렀다. 식장과 장지 예약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손님을 맞고 또 배웅했다. 한국의 장례 문화는 상을 치르는 이에게 충분히 애도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슬퍼할 겨를 없이 어머니를 위로하고 동생을 다독이며 친지들과 아버지를 모실 방법을 상의했다. 장사를 치른 후에는 한 사람의 사망에 따르는 각종 행정절차를 처리했다.


쫓기듯 이런저런 일들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노트북을 켜고 하얀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렸을 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기억을 더듬어 그때 일을 옮겨 적고 있는데, 그때서야 울음보가 터졌다.


수십 년 전 그날 어린 나처럼, 화면 속 글자들이 옛 기억을 소환하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후 일상 속에서 아버지가 문득문득 생각날 때마다 옛 추억을 하나씩 끄집어내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만 묵혀두었던 추억들을 글로 풀어내면서, 아버지를 새롭게 만났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고, 생각지 않게 육아에 대한 조언도 듣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충고도 얻었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같이 살아온 시간에 비해 턱없이 적어 안타깝지만, 정신없는 인생살이 속에서도 이렇게 좋은 추억들을 유산으로 남겨준 아버지에게 매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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