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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Jul 26. 2022

거기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 세계의 일원으로 단 하루 만에 바뀌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해도 나는 그 세계의 사람으로 단번에 변해버리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3년 만에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간 나는, 3년 전의 나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래 맞아 내가 그 사람 앞에서라면 곧잘 이런 얼굴을 했었지.'로 돌아가버린다. 



나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고, 튀지 않는 사람으로 정확히 8시간 만에 변화했다. 그렇게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쉽게 서로를 물들게 하고 색이 변하는가 보다. 



예전에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퇴사를 한 이유가 '내가 거기에 있으면 그대로 물 들까 봐' 퇴사했다고 적은 것이다. 그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런 답답한 마음을 가져보았었기에 한 집단의 분위기에 물들어버릴까 봐 겁을 내는 그 마음을 너무도 알 것만 같았다. 




자그마치 17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갓 입사했던 나는 푸르른 새싹처럼 싱그러운 마음을 안고 근무를 시작했었다. 이제는 과거의 내가 가졌던 그것과 똑같을, 혹은 조금 더 푸르른 마음을 가진 후배 직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선배가 되었다.



전임자가 몇 개월 전에 자리를 비우고 떠난 텅 빈 책상과 의자를 물려받아 물티슈로 여러 번 닦은 후, 파티션에는 조직도와 전화번호표를 붙여두었다. 아직 컴퓨터와 전화, 인터넷 설치는 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업무를 할 수 있게 문구류를 갖춰두었다. 이제 그 도구들을 친구 삼아 많은 일을 해내야 할 것이다. 



편한 실내복을 입고 생활하다가 갑자기 외출 복장을 입고 하루 종일 생활하려니 몸도 뻐근하다. 건물을 가로질러 오고 가며 만나는 직원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더니 정작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그만큼의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야 내가 많이 지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쳐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sns를 급히 비공개로 전환한다. 영상 잘 봤다고, 어디 어디에 출연한 것도 보고 구독까지 했다거나, 책 출간 소식까지 알고 있는 직원들이 있다. 휴직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이게 과연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할 만한 일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모르겠다. 



출근 첫날 하루는 남편이 휴가를 냈다. 허둥대지 않고 출근할 수 있게, 다녀와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짜내지 않아도 되게끔 그가 배려했다. 내일부터는 진정한 실전이다. 퇴근 후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나를 위해 둘째는 준비해둔 간식을 꺼내고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딸이 주는 젤리를 먹는다. 정말로 달다. 하루의 피로가 녹는다. 하지만 설거지는 시키지 않았다. 지난번에 헹굼 설거지만 아주 잠깐 해본 것이 전부인데, 오늘 시켰다가는 마무리하다가 성질이 날 것 같다. 마음만 받겠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요즘 푹 빠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주었다. 아들은 어제 책장을 덮으며 그리스 로마 신화 꿈을 꾸고 싶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 꿈을 꾸다가 그만 무서운 괴물을 만났는지 11시에 한 번, 새벽 1시에 또 한 번 '엄마~~'를 외치면서 잠에서 깨어 나를 찾았다. 첫 출근을 앞두고 단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매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것은 분명한 듯해서 난 또 행복하다. 



이젠 자야겠다. 다리도 퉁퉁 붓고, 하루 종일 너무나 많은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업무를 파악하느라 혼이 나갔다. 매일 더 나아질 일만 남았으니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출근 첫날의 풍경 기록을 마무리해본다. 



* 그나저나 출근 전날에 쓴 글이 다음 메인에 올라간 듯하다. 조회수가 높고, 댓글로 마음을 나눠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놀랍고 감사하다. 충실하게 살고 최대한 솔직하고 담담하게 나의 마음을 적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례라고 믿는다. 이 땅의 모든 워킹맘, 워킹대디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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