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우유"만 반복할 것 같던 아이가 어느 날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볼에 입술을 맞췄다.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겠지, 하고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날이었다. 과묵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환호성을 질렀다. 수면 부족과 과로로 쌓인 스트레스는 마치 봄날의 경계에 내린 눈이 정오의 햇살에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말 그대로 눈 녹듯. 오늘의 아이에게 어제와 특별히 다른 무엇인가를 한 적이 없는데, 아이는 분명 어제와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깊고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얼마나 가야 어둠을 벗어날지 알지 못했다. 아이는 매일 먹고 울고 쌌다. 나는 매일 먹이고 달래고 치웠다. 밑 빠진 독에 날마다 물을 부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갔을 뿐인데, 아이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말의 구체적 의미를 담은 깜찍한 행동과 함께. 밑이 없는 독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손을 넣어보니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떠난 항구는 어느새 수평선 너머에서 아른거린다. 아이는 이제 겨우 3살인데, 주변에서 "나는 언제 그렇게 키우나"하는 초보 엄마 아빠들의 푸념도 제법 듣고 있다. 아내와 가끔씩 산후조리원 시절 아이 사진을 꺼내보곤 하는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아이의 모습에 놀란다. 하루하루 날이 이어질 때는 몰랐던 변화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새벽 근무를 택했다. 회사의 배려가 있었다.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아내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는 질문과 매일 씨름했다.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만 멈춰버린 건 아닌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지 고민하며 남모를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시간은 이렇게 고민할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의 대변 냄새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일부러 아내가 기저귀를 갈아줄 때까지 모른 척 한 때도 있었다. (미안해, 여보.) 잠귀가 밝고 예민해 새벽마다 잠을 설치는 아이 때문에 신경쇠약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이의 투정에 버럭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요리에 자신이 없어 반찬을 사서 먹이거나, 아내가 피곤한 걸 알면서도 반찬을 만들어줄 때까지 손 놓고 있었다. (이것도 미안해, 여보.)
어떤 때는 우울감에 사로잡혀 아이가 악을 쓰며 우는 데도 우두커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때도 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매일 굴렀던 훈련소 시절보다, 하루 2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던 수습기자 때보다 더 힘들었다.
많은 부모들이 그랬겠지만, 대변 냄새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아내가 알아채기 전 내가 먼저 나서서 기저귀를 갈아 줄 때가 늘었다. 밤에 깊이 잠들지 못하는 일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아이가 아무리 짜증을 내거나 억지를 부려도 동요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배워갔다. 날마다 새로운 음식을 만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알지 못하던 사이, 그냥 그렇게 됐다.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하는 나날이 선물이라는 걸 깨달아갔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날들, 마음으로 아우성을 지르며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 남긴 순간들은 아쉽기만 한 추억이 됐다. 자기 연민에 빠졌던 수많은 그날들은 사실 다시 오지 않는 보석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다이아몬드 광맥을 앞에 두고도 곡괭이 손잡이가 거칠다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소중한 진실을 빨리 깨달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아이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물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라고 답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 날마다 아이와 더 깊은 사랑에 빠지고 있으니까.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오후 4시의 놀이터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일은 이제 없어졌다. 여전히 동화책을 읽어주며 졸긴 한다. 그럴 때면 아이는 어깨를 툭 치며 "아빠, 일어나요"라고 혀 짧은 소리로 말한다. "어, 미안해, 아들"하며 깨어난 뒤 다시 책을 읽어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다.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인터뷰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노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교수는 자신을 인터뷰한 김지수 조선비즈 기자를 향해 "이 대화가 노동이 될래? 예술이 될래? 그건 자네에게 달려 있네"라고 짓궂고도 묵직하게 말했다.
노동과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영혼'이다. 온 마음과 뜻을 담아 하는 일이라면, 가장 비천한 노동도 예술이 될 수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영혼을 가진 존재라서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순간을 예술로 만들 수 있다.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도,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도 결국 우리 영혼에 달린 문제다. 눈앞에 닥친 고통의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하다 보면 노동이 예술로 도약할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이 찾아오는 걸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때 중요한 건 자기 연민이나 불평불만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라는 지혜의 말을 알려줬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길'이라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축복 같은 오늘을 감사히 여길 수 있길'이라고 기도한다.
결혼이 두렵다는 한 후배는 "그래도 아이 키우는 기쁨이 있잖아요"라고 짐짓 말했다. 피곤에 절은 내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면서. 나는 "접근 방식이 잘못 됐어"라고 잘라 말했다. 후배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기쁘려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기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후배는 "아, 그럼 더욱 결혼이 두렵다"고 했다. 이 말에 나는 "아이를 낳기 전에 느꼈던 기쁨과 슬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더욱 깊어진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될거야. 아이를 낳아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런 일이야"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전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짓는 후배 앞에서, 나는 속으로 몰래 '이만큼 자랐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