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깨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스템 세팅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갑자기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겨서 정해진 일정을 깨야 했던 때였다. 예전에 대학에 강의를 나갔었다. 강의는 고작 3시간 혹은 1시간 반 정도 진행되기에 시간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면 머리의 피가 바짝 말랐다. 급한 마음에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협박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겨우 겨우 아이를 어린이집에 넣고 오면 강의가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다루는 기술이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차 저차 해서 강의를 그만두었다. 한 번은 교회에서 대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출발해야 하는 시간에 아이가 큰걸 푸짐하게 보았다. 기저귀 갈고 씻기고 하느라 예배에 늦었다. 겨우 기도 시간에 맞춰 갔지만, 하, 망했다. 하나의 흑역사가 추가되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오래간만에 약속을 잡아 놓으면 아이가 아팠다. 미리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귀신같이 알았다. 아이들은 직감적으로 엄마의 심경에 있는 변화를 눈치채나 보았다. 아이는 로봇이나 인형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아이는 살아있고 본능과 자기주장이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한결같지 않고 때때로 기분이 나빠지고 몸이 안 좋아진다. 문제는 그에 따라 엄마의 상태도 연동이 된다는 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다 할 수는 없고, 아이의 상황과 적절히 맞춰 나가야 한다. 여기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글 쓰는 일도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글쓰기는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아서 그냥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균형이 흐트러지면 순식간에 힘들어진다. 웬만하면 루틴대로 써 나가야 계속 써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엄마의 루틴은 언제든 와장창 깨질 수 있다.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자! 엄마에겐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흐름이 끊기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대비를 해 두면 길을 잃지 않고 빠르게 글 쓰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내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견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혼자 집중을 할 수 있을 때 진행하고자 하는 글의 전체 그림을 미리 그려 본다. 매일매일 ‘뭘 쓸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짜 내야 하는 상황에서 변수가 생겨버리면 정신이 흩어져서 글을 이어서 쓸 수가 없다. 대신 미리 글감을 짜 놓으면, 하루 변수가 생겼다고 해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다음 날엔 이어서 글을 쓸 수가 있다.
엄마는 알 것이다. 매일매일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메뉴 고민하는 게 은근히 힘들다는 거. 요리하는 거보다 고민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된다는 거. 그러다가 힘들어지면 포기하고 ‘뭐 시켜 먹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외식 몇 번 하면 카드값이 쌓이고 건강도 안 좋아진다.
반면에 하루하루 즉흥적으로 메뉴를 정하지 않고, 미리 식단을 짜놓는 사람들은 크게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집밥을 해낼 수 있다. 고민하는 시간에 찌개 하나 끓이거나 볶음 하나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재료도 미리 사놓는다. 또 요리를 자주 하다 보니 이전 식사 준비하면서 미리 손질해 놓은 재료도 보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식사 준비에 에너지가 덜 드니까 지속해서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집밥도 그러한데, 정신적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하는 글쓰기는 어떨까. 미리 뭐 쓸까 고민을 한꺼번에 해 두면, 쓸 때마다 ‘뭐 쓸까?’하는 고민을 덜 수 있어서 잠시 흔들려도 이어서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다.
빈칸을 채우고 싶어 하는 인간의 습성을 이용한다. 어느 날 자이가르닉이란 심리학자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어떻게 긴 메뉴를 외울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런데 웨이터는 모든 메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산이 끝나지 않은 테이블의 메뉴는 기억하면서도, 계산을 다 한 테이블의 메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자신의 입장에서 끝내지 않은 일과 끝낸 일을 구분하고, 끝내지 않았다고 판단한 일은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걸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한다.
사람은 미완성된 걸 완성하고자 하고, 빈틈을 메꾸고 싶어 한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요새 유행하는 MBTI 유형 중에서 직관적이고(N) 비체계적인(P) 유형이다. 정리 정돈과 계획에 진짜 약하다. 어쩌면 아이가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수에 약한 편이다. 그런 사람도(!)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낼 수 있었던 비법이니, 웬만한 사람에게 다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빈칸 채우기 말이다. 미리 제목을 써 놓고, 그 밑에 한두 줄 정도 글을 써 놓는다. 그리고 화면을 닫아 버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뇌가 일을 시작한다. ‘그 뒤를 어떻게 이어나갈까…’, ‘그 빈칸을 어떻게 채울까’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떠올려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빈칸을 열어젖히면 자동적으로 쓰게 된다. 이 글도 그렇다. 그저께 제목과 첫 째 줄은 써 놓았다. 거기에 덧붙여 소제목 3가지도 써 놓았다. 어제는 아이가 유치원에 안 간다고 버텨서 하루 쉬었다. 그리고 오늘 또 이어서 쓰고 있다. 또 언제 어떻게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얼른 써야겠다는 마음도 더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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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방법은 내가 무얼 썼는지 적어 놓는 것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쳐 나가면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글은 무슨 글. 지금 당장 눈앞에 쌓인 설거지와 빨래가 시급한 게 사실.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일상이 금세 흐트러진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방향성을 잃고 만다.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것인지 잃어버려서, 한동안 손을 놓으면 다시 시작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긴 방학을 정신없이 지내고 나면 무얼 해야 할지 서성이게 된다.
이때 이전 기록을 꺼내 보면 좋다. 어떤 글을 어디에 썼는지 스프레드시트나 다이어리에 목록으로 적어 놓은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는 위안도 얻을 수 있고, 어떤 작업을 하다가 흐름이 끊겼던 것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중단을 하게 되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길을 잃지 않고 끝을 낼 수 있다.
가족이 생기면서 혼자 살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내 것을 내려놓는 게 많아서 불안하고 화가 났었다. 애를 낳고도 한참이나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애가 애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어도 수긍을 할 수밖에. 그럴 때면 ‘애 때문에…….’라며 탓을 하고 싶어지기도 했는데, 그러기엔 애가 너무 소중하고 예쁘지 않나? 또, 그 아이를 누가 낳았나…? 바로 나다.
아이를 탓하기보다 내가 변하는 쪽이 더욱 현명하다. 상황이 안 되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시도한 새로운 방식이 더욱 좋기도 하고 말이다. 또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이를 탓할 일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엄마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