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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르마이 Oct 22. 2023

< 에필로그 > 그림자와 넓은 세상

행복한 삶이란 방해받지 않고 탁월함에 따라 사는 삶이다.

_정치학(아리스토텔레스) 



이 글은 아이의 성취에 기여하는 아빠의 역할이 '무관심'이라는 말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가 어떤 면에서는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모가 자녀 교육에 관심이 지나쳐서 아이에게 부담이 되기보다는, 아빠라도 무관심한 것이 아이에게 이로울 수 있는 시대입니다. 


치열한 경쟁으로 아이의 어깨는 무거워지고, 경제적 풍요로 부모가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해주려는 능력과 욕망은 넘치는 시대입니다.


저의 경우, 자녀 교육에 관심이 필요한 쌍둥이 유년기에 적당한 관심을 줄 수 있었고, 쌍둥이가 본격적으로 학교 공부를 시작한 초등학교 3, 4학년 이후이 시기부터 '무관심'하고, 묵묵히 지원하는 역할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 듯합니다.


ㅣ 아버지라는 그림자 ㅣ


때론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림자는 말은 걸거나 실체를 잡아끌 수도 없습니다. 그림자는 기쁨도 슬픔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언제나 함께 있어 주는 존재입니다.


아이의 삶에는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부모가 돕는 방법은 제각각입니다. 돌아보니 저의 방법은 책임, 존중, 자유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는 몇 가지 역할이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쌍둥이가 이런 아빠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잘 자라 주어 감사합니다. 


빛이 비치는 곳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저는 무관심하려 했다기보다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저의 성향이나 과오 때문에 가족과 관계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늘도 있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받아들입니다. 아빠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늘이 되어도 충분히 행복한 존재입니다.


인생은 깁니다. 부모로서만 인생을 살기엔 너무 길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돌보는 것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심한 잔소리나 질책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빨리 올수록,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듯합니다.


부모는 양육자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아이의 몫입니다. 그 몫은 뺏어 올 수도 없도 뺏어와서도 안 됩니다


ㅣ 아이가 앞서게 하자 ㅣ


부모가 앞서면 아이는 '부모의 등' 밖에 못 보고, 아이가 앞서면 아이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부모의 조급함으로 아이를 성향에 맞지 않는 길로 몰아가거나, 부모의 욕심인 줄도 모르고 아이에게 무리한 목표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앞서면 아이의 미래는 부모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모에게 계속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설가 백영옥은 한 칼럼에서 자녀 교육에 지나친 간섭과 그 병폐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 주말에 카페 옆자리에서 세 시간 넘게 수학 문제와 씨름하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아이가 풀고 있는 문제집은 놀랍게도 중학교 교재였다. 틀린 문제를 엄마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아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중학교 가서 뒤처지지 말라고 미리 고생하는 거니까 조금만 참자!”라고 말하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선행 학습의 현장에서 원고를 쓰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 그 아이보다 먼저 일어났다. (...)


역사상 가장 높은 스펙을 보유한 세대이지만 취업은 가장 어려운 MZ 세대들이 취업 후에도 방황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인의 자녀도 예외는 아니라,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곳에 취업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아 퇴사를 고민 중이었다. 지인은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너무 많이 투사해 지나치게 아이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진로를 몰아붙인 것 같다고 후회했다. (...)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비가 오면 우산이, 햇빛이 쏟아지면 양산이 되고 싶은 애틋함은 때로는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 필요하다고 믿는 것’으로 뿌리내리기 쉽다. 하지만 온실의 적당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자라난 화초는 약하다. 


폭우 후 땡볕 같은 방황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포도는 기가 막히게 달기 때문이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 사랑이 과하면 다정도 병이 된다.  >> 

_다정도 병인 양하여(백영옥의 '말과 글' 칼럼 중에서)


부모의 불안을 투사하고, 부모의 욕망이나 경쟁심을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직 여물지도 않은 연약한 영혼인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성취나 실패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면, 아이에 대한 기대가 부모의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살펴봤으면 합니다. 


가능하다면 아이가 넓은 세상을 보도록 부모는 비켜서 주고, 조용히 따라가 주면 좋겠습니다. 가끔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조언하는 정도로 말이죠. 부모가 앞서지 않아도,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랍니다.


저의 변명이, 부모로서 아이를 ‘책임’ 있게 양육하고, 아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아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가는 ‘자유’를 허락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이렇게 길게 아빠의 변명을 늘어놓고 보니, ‘결국 자기만족이었던가?’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아내가 쌍둥이 교육과 성취에 부모 역할의 90% 이상을 기여한 듯한데, 그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90%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게 부끄러움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농담처럼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후속 편은 <엄마의 정보력>, <쌍둥이의 공부법>이라고. 후속 편을 쓰려면 아내, 쌍둥이와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습니다.


이 글을 빌어 부족한 아빠가 이런 변명이라도 하면서 자기 만족할 수 있도록 대학 입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아내와 쌍둥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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