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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Aug 24. 2024

이해하는 것과 보는 것

매년 호주 멜버른에만 가다가 올해 처음으로 십여 년만에 예전에 내가 살았던 호주 수도로 일주일 정도 다녀올 수 있었다. 


경상도 사람인 나는 거의 아무도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수년간 노력해서 최초로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된 이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십여 년 전 너무나도 불행했던 전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정리한 후, 2년쯤 전 지금의 독일계 호주인인 남자친구를 만나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호주에 산 지가 적어도 30년은 될 터인데 여전히 그의 발음에는 독일어 액센트가 남아있었고, 그의 영어는 유창하지만 독일어의 느낌이 강하게 묻어났다. 그런 그와 얘기하며 나는 자연스레 나의 고정관념 속에 있던 독일인의 이미지를 꺼냈다. '규칙을 벗어나는 조금의 유연함도 없으며, 유머러스한 면도 없고, 잘 웃지도 않지만 매너는 아주 좋다.' 그런데 내 앞에 있던 그도 다소 그랬다. 


오랜만에 오는 여친의 친구를 위해 오븐에 여러 시간 요리를 해서 정성스레 차리고, 간간히 스낵을 먹자며 내오고, 맥주도 마시겠냐며 권하고... 하지만 그의 말에는 2프로 부족함이 느껴졌다. 마치 손님이 오셨을 때 어떠어떠한 행동을 하고 말을 한다는 매뉴얼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박사였는데 주로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다. 거의 사람을 직접 만날 일이 없다는 거다. 주로 그는 과학과 관련된 얘기를 잘했는데 브로콜리를 먹다가도 식물세포 구조와 DNA로 이야기가 흘렀다. 그러다 다른 얘기를 하다 다시 그런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곤 했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좀 더 쉽게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다른 주제에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긴 하지만 그는 확연하게 예의상 들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의견은 말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의견이 궁금하거나 듣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예의상(?) "너는 어떻게 생각해?" 같은 말을 던지기도 했는데 마치 "How are you?"라고 물으면 "Fine, thank you!"라고 하고 그 뒤에 " And you?"를 붙이는 느낌이랄까? 


그런 그는 냄새에도 예민해서 못 먹는 채소가 2가지 있었는데 샐러리와 fennel(페널: 주로 수프에 넣어서 먹는 서양 채소)라고 했다. 나는 샐러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향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다른 어떤 감각적 예민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냄새에는 정말 예민한 것 같았다. 


그에게는 식탐도 좀 있어서 뭔가를 먹는 것에 절대로!! 돈을 아끼지 않았고, 초콜릿을 사면 한 자리에서 다 먹어치워서 사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무엇이든 좀 과하게 하는 경향이 있고 절제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해외여행할 때 이코노미를 절대 타지 않고 항상 비즈니스석을 이용한다고 했다. 그가 키가 유독 큰 것도 몸집이 아주 큰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오랜 시간 아주 밀착된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언니는 보기에 좋은 화초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로 먹을 수 있는 고추나 토마토, 허브 등을 키웠던 것 같은데 집 안에 '보기에 좋은 예쁜' 화분들이 많았다. 언니의 남친이 식물 가꾸는 걸 무척이나 좋아해서라고 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신경다양인들은 동물이나 식물과의 교감이 아주 활발해서 식물을 아주 잘 키우거나 동물들의 마음을 잘 읽고 다루었다


그는 매일 8시 반이면 잠자리에 들었고, 침대에서 조용히 한 시간 정도 누워있다가 잠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호주에는 밤이면 할 게 없으니 이렇게 규칙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많이 있긴 했다.  


너무 짧은 시간 동안 그를 보았기에, 그리고 나는 그가 보여준 자신의 모습만 아주 쬐끔 볼 수 있었기에 사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내내 이것이 그의 독일인적 특징일까, 신경다양성적인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실타래를 풀어주었다. 


내가 난독증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그에게 내면의 목소리가 있는지, 이미지로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았을 때 그는 당연히 이미지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독일에서 학교 다니는 내내 아무도 자신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수업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문자로 가득 찬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건 너무나도 가혹했을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의 기억을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너무나도 힘들었다면서. 나는 그의 경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People don't get it)'고 종종 말한다고 했더니, 그가 내 말을 정정했다. 나는 표현도 자신과 다르게 한다면서.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People don't see it)'고 말한다고 했다. 


그랬다, 그와 나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의 평균 취침시간인 8시 반을 넘어 9시가 좀 넘어 인사를 하고 자러 들어갔다. 그는 아마도 많이 피곤하였을 것이었다. 굳이 내가 상상을 해 보자면 된장찌개에 밥이 익숙한 내가 나이프와 포크가 나오는 고급 식당에서 정장을 입고 누군가와 격식에 맞춰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피로함 같은 거랄까?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어떤 옷을 입고, 나이프와 포크는 어떻게 쥐며, 어떤 식으로 말을 하고, 어떻게 웃으며, 어떤 속도로 식사를 해야 하는 지를 다 알고 있지만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그런 상황이랄까?


그렇게 나는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또 다른 신경다양인을 만났다. 


#신경다양인 #자폐증 #아스퍼거스 #난독증 #시각적사고 #이미지형 #예민한감각 #동식물의 마음헤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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