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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의 백설기 Oct 24. 2021

빛날 기회를 잃었다

그렇게 살았어도 괜찮았으니까 그런 거야 

"그렇게 살았어도 괜찮았으니까 그런 거야." 
'이전 회사에서 그렇게 나이브하게 일했어도 괜찮았으니까 지금 옮겨온 회사에서도 무사안일하게 일한다'며 새로 들어온 직원을 타박하는 A의 말을 들으며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안정된 회사에 큰 도전 없는 업무,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일상. 언젠가부터 도전과 발전 대신 정체된 삶을 살고 있는 내게 던지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커피 얼룩을 물로 세탁하는 대신 휴지로 대충 덮어두고 일어선 것처럼 고개 돌려온 시간들이 채무 상환장을 들이미는 사채꾼의 얼굴처럼 벼락같이 떠올랐다. 이렇게 살았어도 괜찮았으니까 이렇게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언젠가는 이런 카페를 열고 싶기도 했다. 1층은 얼굴이 하얀 페이스트리 셰프가 10대 여고생들의 환호에도 요동 없이 진중하게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는 카페. 2층은 작품의 퀄리티는 높으나 대중에겐 알릴 방도가 없는 실력 좋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놓아 두고, 3층은 회의를 하거나 워크숍, 북콘서트나 강연장으로 대관을 해주며 정기적으로는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든다. 
어떤 날에는 책과 위스키가 있는 작은 혼술집을 열고 싶기도 했다. 인스타 광고도 안했는데,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그곳으로 어떻게들 알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술가와 작가, 힙스터들이 모여들고, 인터뷰 제의와 몰려드는 손님을 쳐내며, 내가 지인들에게 여유롭게 술 한 잔씩을 돌리는 풍경. 

일을 하지 않아도 월 2000씩 꽂히는 파이프라인을 만든 나는 취미로 글을 쓴다.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요가를 하고 욕조가 있는 욕실에선 히노키 선반 위에 올려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 이탈리아와 뉴욕에 2개의 집이 더 있으며 프랑스 전원마을엔 가족들이 자주 모이는 별장이 있다. 출판사와 말레이시아판 출간 미팅을 마치고 저녁엔 정원에서 지인들과 바비큐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이런 환상을 벗어난 현실엔 불어난 배와 몇 년째 동결된 통장을 노려보고만 있는 마흔도 훌쩍 넘은 내가 있다. 나보다 내가 먹는 나이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불친절한 사회를 매일 마주하는 나. 난 끝났고, 빛날 기회를 잃었고, 아무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거고, 모두 가진 것 없는 나를 비웃을 거라는 불안에 빠져 있는 나 말이다. 이 무슨 자학의 늪이란 말인가. 


떨어진 화살을 주워 가슴에 꽂는 일 
디카페인 티를 시켜놓은 카페 건너편의 여자는 본 투비 네이티브가 연상되는 자신 있는 영어 말투로 다음 회의 일정을 잡는다. 구두부터 헤어스타일까지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녀의 몰스킨 스케줄러에는 아마도 시간 별 일정이 빈틈 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겠지. 
지하철역 계단을 2개씩 성큼성큼 올라가는 남자. 가슴팍에 빵 봉지를 식을새라 끌어안고 있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만삭의 아내를 위한 것일까. 남자의 걸음은 바빴다. 퇴근길에 산 빵이 식을까봐 가슴에 품는 연인을 둔 그 여자는 아마도 하루 중 열에 아홉은 행복할 것이다. 

나만 빼고 각자의 자리에서 다 빛나고 있는 것 같다. 당근에서 산 구두가 짝퉁임을 들킨 동창회처럼, 자신감 넘치던 20~30대의 반짝반짝 빛날 기회는 내게서 아예 사라진 걸까.
하지만 몰랐다. 누가 뭐래도 굳건히 자기 삶의 여정을 뚜벅뚜벅 거침 없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저들에게도 혼란스럽고 두렵고 보잘것 없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떤 유튜버의 말마따나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그래, 늙지 않을 듯 SNS에서 하늘로 올라갈 듯 치켜올라간 힙과 돈을 뽐내는 너도 나도 다 늙는다. 

가슴 아픈 멜로 영화가 성공하는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실패한 연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적막해진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망한 소개팅이 얼마나 큰 활기를 불어넣는가. 대부분 그 체험담은 '소개팅 폭망 유튜브 채널이라도 열라'는 성화를 받는 내 지분이 많지만. 보기만 해도 멘탈이 털리는 남의 연애를 보여주는 리얼 연애 예능이 시청률 고공 행진을 기록하는 이유는 대부분 힘들게 울고 견디며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나처럼 무연애지대에 살며 오래전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거나. 


연인에게 뛰어갈 때 흘러나올 법한 BGM, 에너지 넘치는 출근 길을 위한 BGM도 있지만 프리젠테이션에서 대망신을 당한 날이나, 힐을 신은 채 결혼식을 3개나 참석하느라 밥도 건너뛴 날을 위한 BGM도 필요한 법이다. 


각자의 우주는 나름대로 팍팍하다 

과거의 일기를 읽어보면 ‘인터스텔라’의 쿠퍼(매튜 매커너히)처럼 시간의 벽에 갇힌 채 “안돼, 과거의 나야 그러지마”라며 말리고 싶은 내가 있다. 땅에 떨어진 화살까지 구태여 내 손으로 다시 주워서 가슴에 꽂는 일을 반복해온 나,  안쓰러워서 꽉 안아주고 싶은 나 말이다. 어느 날인가의 비참했던 실연의 기록, 언젠가 선물해야지 싶어 적어놓은 엄마의 허리둘레와 신발 사이즈, 처음으로 작아진 어깨를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까지 한 인간의 감정적 배아 기록이 일별, 주별, 월별로 친절하게 담겨져 있다.

천재든 범인(凡人)이든 좁은 방에 들어가서 뱉어내는 배설의 말은 모두 검고 무겁다. 그 팍팍한 우주를 견뎌온 기록이 종이 위에 빼곡히 적혀 있다. “내 팍팍한 인생에 네 고민은 너무 기름지다”고 말하는 친구 대신 부끄러워 말 못할 비밀을 눈감고 들어주던 이 네모 반듯한 종이묶음 덕에 내 속의 아이는 매번 많이도 살아났다. 펜 촉이 잠금 해제 버튼이 되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했던' 소망들을 지면 위에 부려놓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며 쓰는 일기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내가 아니라도온 우주가 힘을 합쳐 나를 다그치는' 사회를 견뎌 내고 있다. 인생이라는 녀석은 매번 참신하고 노련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힌다. 그러니 나라도 내게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면 어떨까. 
가슴에 퍽 하고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날 놀라게 한 낙엽. 자신이 빛날 때가 지나버렸음을 알아버린 이가 가진 무게 때문인가, 10월의 마지막 날 떨어지는 낙엽은 나풀거림도 없이 툭툭 길거리로 떨어진다. 하지만 돌에 붙은 젖은 낙엽이 얼마나 좋은 향을 내는지 아는가? 떨어지는 낙엽이 얼마나 붉은지는.

빛날 기회가 끝난, 지는 해라고? 지는 해가 얼마나 뜨거운지 아냐?
까짓거, 내일 올 불운 따위 모르는 해맑은 여행자처럼 살아보자.
크나큰 행복보단 덜 불행한 한 조각들을 선택하자.
작고 소중한 일상을 잃어버리지 말자.
터무니 없는 부조리를 마주하면서도 나날의 행복을 충실히 움켜쥐자.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자. 나를 포함한 도시 생활자들이 연애든 여행이든 인생이든 모든걸 너무 공부하고 너무 준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빛날 기회는 또 온다. 


일기장에 적힌 '내게 쓴 편지'(aka. 올해의 결심)를 다시 읽어본다.

'건강하고 안정된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놀고 사랑하기를.

불행이 찾아와도 그것이 일상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구겨 쓰레기통에 넣기를.

오늘 비참한 하루를 보냈더라도 내일 눈뜰 나를 향해 다정한 편지를 써보기를.

그리고 하루만이라도 아무런 다그침 없이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일 한 가지를 내게 기꺼이 해주기를.

자신을 좀더 믿고 덜 불안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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