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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의 백설기 Oct 24. 2021

목욕탕에서 치른 구남친 디톡스

도시 영혼의 물리치료실


 

스마트폰, 책, 애플워치는 물론 실오라기 하나 들고 들어갈 수 없는 목욕탕이야말로, 인사이트를 발견하고 잡생각을 휘발시키기엔 최적의 장소다. 오죽하면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을까. "돈 아깝구로 뭔 목욕을 밖에서 시키노~!"라는 시어머니의 불호령을 뒤통수로 묵묵히 받아내며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탕으로 향했을 젊은 엄마에게 '장난감 허락의 시간'이나 '힐링의 순간' 따위를 기대 할 수 있었을리 난무하다. 오 남매의 넷째 딸로 태어나 보드라운 엄마의 손길은커녕, 한 살 차이 남동생과 세트로 묶여 늘 우악스러운 때밀이 세례를 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이 든 지금은 살살 때를 미시는 세신사님께 몸을 맡기고, 오일 마사지를 받는 호사까지 가끔 내게 선물한다. 


하지만 지금은 코시국. 목욕탕은 사찰 경내처럼 엄숙하고 조용했다. 시끌벅적 동네 사랑방 분위기는 사라지고 흰 마스크를 착용한 맨몸의 아주머니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스크만 착용하고 탕으로 들어서는 것은 뭐랄까, 양말만 신고 누드로 대나무 숲을 걷는 듯한, 사회 질서를 반대로 가로지르는 날것의 쾌감을 선사한다.   
국회 보좌관이든, 디자이너든, 폭력배든, 목욕탕에선 누구나 공평하게 초기 인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많은 두목들과 보스가 목욕탕으로 아랫사람을 불러 지시하는 이유 또한 가장 편한 상태에서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며, 위계를 선사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난 세신사님께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며 개꿈을 꾸었다.  
  
소울 스팟 목욕탕에 나타난 그 녀석 
엉거주춤 목욕탕에 들어서서 ‘165(선)(165번 라커 주인이 세신비를 선불로 줬다는 얘기다)’을 칠판에 적고 탕으로 들어간다. ‘녹차탕’과 '보석탕'을 옮겨 다니며 코팅지가 거의 벗겨진 두 달 정도 지난 신문 기사를 차례대로 읽고 나면 비로소 “165번!”을 부르는 세신사의 우렁찬 보컬이 탕을 울린다. 적당히 불려진 몸을 침대에 누인 채 때밀이로 ‘탁탁’ 다리를 치는 방향에 따라 왼쪽, 오른쪽, 뒤로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몸을 뒤집다 까무룩 잠이 든다. 
하지만 코시국을 뚫고 간 내 소울 스팟에서 왜 또 하필 또 그 놈의 꿈을 꾼 것인가. 10년을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던 구 남친. 마침내 완전히 헤어진 지 1년, 무심코 눌러본 녀석의 페이스북에는 ‘우리 오빠예요, 잘 생겼죠?’라는 말과 함께 턱시도를 입고 신랑 메이크업을 진하게 한 그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그와 팔짱을 낀 채 수줍게 웃는 똥 머리 헤어의 여자가 녀석의 예비신부임에 틀림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구남친 악몽이 내 렘수면으로 끼어든 것이. 첫 꿈은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썸남과 내 앞에 녀석이 나타나 선물박스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턱시도, 구두, 시계 등 예물이 놓여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녀석은 말했다. “내 결혼식에 하고 갈 것 좀 골라줘.” 옆에서 자던 언니의 목격담에 따르면 난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치 가위 눌림에서 벗어나려는 듯 허공에 헛발질을 해댔다고 한다.

두 번째 구남친 등장 꿈의 배경은 쓰나미 같은 큰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 내가 집채 만한 파도를 피해 대차게 도망가려는 찰나,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에서처럼 모래밭에서 구남친의 손이 쑥 올라온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손쉽게 내 발목을 잡아 올려 바다로 내팽개친다. 파도에 휩쓸린 나는 공기방울을 내뱉다가 꾸엑거리며 잠에서 깼다. 역시 첫 번째보다 대찬 두 번째 발길질을 목격한 언니는 내게 잘 듣는다는 수면 유도제를 추천했다. 


그리고 감미로운 세신사 아주머니의 터치 속에서 꾼 이번이 세 번째 꿈이었다. 한강에서 애정하는 소맥과 함께 족발을 뜯고 있는데 녀석이 유모차를 끌고 날 지나치는 꿈이었다. 결혼하고 애까지 낳을 녀석에게 미련이라도 남은 겐가? 이불 대신 죄송하게도 세신사 아주머니의 팔을 걷어차며 때침대 위에서 잠을 깬 나는 마무리 단계로 얼굴 마사지를 받으며, 그 녀석과 헤어진 이유를 찬찬히 복기해봤다. 무려 10년 사귄 애인 생일에 단돈 3만 원 짜리 문화상품권을 선물하고, 20년 된 부부 같은 침묵이 이어지는 데이트에다, 각종 이모티콘과 싸이월드 체 말투로 웅축해 결코 포용할 수 없었던(사실 이게 가장 참기 힘들었다) 심각한 수준의 오타. 마지막으로, 한달 간 잠수를 타 납치 신고까지 하게 만든 사건이 기폭제가 돼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이별 통보를 한다.
"그만 헤어지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많이 지쳤던 걸까. 기막히게도 그는 기다렸다는 듯 풀로 악셀을 밟으며 떠났고, 헤어진 지 정확히 1년 만에 결혼소식을 전해왔다. 정확히는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누른 내 손가락이.  

교통 사고 처리 모습이 섹시했다고? 

잠에서 깬 뒤 비누칠을 받으며 한때 빛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분'을 부르는 알렉스처럼 새 구두에 까진 내 뒤꿈치에 다정하게 밴드를 붙여주던 모습, 운동화 끈이 풀리자 185센티의 키를 구부려 156cm 호빗 여친의 끈을 묶어주던 모습. 그 끈은 신기하게도 절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참, 교통사고가 있었지. 
어느 날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앞차를 박게 된 녀석. 매뉴얼대로 조수석을 감싸며 가장 먼저 "괜찮아?" 내 안부를 묻고, 뒷목을 잡고 내리는 앞차 운전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 능숙하게 사고 뒤처리를 하는 모습. 친구들은 '사고 뒷수습하는게 섹시하냐?'고 놀렸지만 오랜 연애의 권태는 사고가 선사한 아드레날린과 함께 녹아내렸더랬다. 사고의 후유증이 채 가라앉지 않은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연쇄살인범처럼 침묵하는 차 안에서 난 짹짹거리는 사랑의 참새가 되어 있었다. 

목욕탕에서 나와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깨달았다. 내가 꾼 세 가지 구남친 꿈은 10년 연애를 뒤로 하고 1년 만에 결혼한 구남친에 대한 ‘미련’ 따위가 아니라, 20대라는 인생의 뜨거운 시기를 공유했던 내 청춘에 바치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발로였다는 것을. 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날 사랑했고(난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이었지만), 미련 없이 사랑한 만큼 빛의 속도로 날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는 이제 들을 수도 없는 나만의 독백을 드라이기 앞에서 읊조렸다.

'나와 결혼해주지 않아서 진심으로 고마워. 간장종지 같은 네 그릇에 담기지 않게 해주어서. 그 안에 담기려고 나는 바짝바짝 졸아들었겠지. 네 덕에 나는 넓은 바다 속을 유영하며 아름다운 물고기떼를 보게 됐어.'

그렇다. 난 목욕탕에서 난 내 진피조직에 아로새겨진 그와의 기억까지 벗겨버린 것이다. 365일 쉬는 날 없는 사우나가 특급호텔 스파도 해내지 못하는 ‘멘탈 디톡싱’을 선물한 것이었다.
세신사 아주머니에게 찬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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