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50분 동안 강연을 해야 하는데, 30분 만에 끝나버렸다. 발표를 랩처럼 했다. 쇼미더머니에 나온 참가자처럼! 강연 준비를 안 했을까? 했다. 발표하는 방법을 몰라서였을까? 아니, 엄청나게 공부했다.
한데, 50명 남짓 불특정 다수의 성인 앞에 서자마자 긴장감이 폭발했다. 목소리 볼륨 조절이 고장 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나마 준비를 했기에 30분 동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10년 전 경험인데도 떠올릴 때마다 이불킥을 부르는 흑역사다.
망한 경험만 있는 건 아니다. 팟캐스트 진행을 1년 반쯤 했으니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으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러니 재취업으로 ‘강사’를 택하는 일은 선택지에 있을 수가 없었다.
미용학원에 등록했다. 자격증이 없어서 ‘재취업’이 힘들다길래 고심 끝에 내린 결론. 미용사 자격증을 따서 ‘염색방’을 오픈하는 게 목표였다. 이론을 배울 때만 해도 순탄한 미래가 그려졌는데 본격적으로 가위를 들면서 암흑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가위 잡는 방법은 지금도 이해를 못 한다. 가위를 제대로 못 잡으니 커트도 엉망진창. 이론을 ‘몸’으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치명적 약점이 이런 식으로 내 앞길을 가로막을 줄은 몰랐다.
포기하기엔 돌아갈 곳이 없어 의미 없이 학원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실기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필기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책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 그날로 필기시험 준비반을 꾸렸다. 1년 내내 필기시험에 떨어지던 외국인들까지 한 달 만에 합격시키는 성과를 냈다.
어쩌면 가르치는 일을 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스쳤다. 수많은 날을 갈등하긴 했다. 사람들 앞에 서기 싫은 마음을 다스리며 ‘강사’로 첫 발을 내디뎠다.
역시 경험해 보기 전엔 모른다. 막상 강사를 시작하니,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내향인에게!
강사라는 업은 강의 시간을 제외하곤 혼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말인즉슨, 한정된 에너지 관리가 용이하다는 뜻. 누군가와 같이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된다니.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에너지를 소진시키지 않아도 된다니.
일하는 스트레스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더 큰 스트레스를 느껴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나에게는 천국 같은 근무 환경이었다.
가장 크게 스트레스를 느끼는 영역에서 자유로워지니 사람들 앞에 섰을 때의 떨리는 마음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무대공포증은 연습하면 극복할 수 있다. 아니 익숙해진다. 오늘은 피아노 건반을 ‘도레미’만 쳤어도, 내일은 ‘도레미파솔’을 칠 수 있는 것처럼.
가끔 천장을 보고 강의한다는 피드백을 받은 나는 이젠, 교육생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한다. 200여 명의 교육생 앞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마저 생겼다. 내면의 배터리가 고갈되지 않아 ‘몰입’이 필요한 순간, 최대치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서다.
“내향적인 성향인데 강사를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오히려 내향인에게 진짜 좋은 직업이에요.”라고 운을 뗀다. 내향적이라서 사람들 앞에 서지 못하는 게 아니다. 연습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하버드대 심리학자인 에이미 커디의 조언을 기억하자.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나를 속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