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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융이 Aug 29. 2018

캐나다에서, 미국과 중국

맥주 한잔에 안주

드디어 20회, 마지막회를 맞이했다. 글을 연재하는 과정을 말하자면 고난과 시험의 연속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중간에 크게 다치기도 했고,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어서 뜻대로 글이나 사진을 준비하지 못하고 그냥 마감 시간을 맞추기 급급했던 적들이 몇 차례다. 그러다 보니, 지금 와서 돌아보면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다. ‘좀 더 조사를 할 걸. 좀 더 준비를 할 걸’ 하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20주라는 기간을 글로써 채웠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절기에 아트센터와 퍼블릭 라이브러리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

솔직히 살기 어떻냐고 물으면 나는 나름 좋다고 하고프다. 중국인들이 편의를 위해 개발한 것들이 많아서 한국과 다를 바 없이 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대행 서비스 같은 것들도 많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리치몬드라는 곳에서 나 개인적으로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며 얻은 도움들이 많이 있던 것과는 달리, 또 먼저 캐나다에 자리했던 이들의 입장에선 아쉬움들이 많아 보였다. 또 캐나다와 미국을 헷갈리던 나의 시선의 잘못된 점들을 이들을 통해서 많이도 깨닫게 되었다. 


캐나다에 살기 전, 나는 캐나다라는 곳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비슷한 문화, 같은 언어. 이 정도로 아주 단순하게 판단해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 처음 적응기에 TV만 틀면 나오는 미국 방송들, 미국과 같은 브랜드의 상점들, 물건들을 통해 그 편견을 더욱더 깊이깊이 키워왔었다. 그러다 캐나다 현지의 친구들과 이 곳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이런 생각의 오류들을 고쳐올 수 있었다. 특히 이런 편견을 해소하는 데, 이곳의 G와 B의 역할이 무척 컸다.


G는 오래전 한국에서 유학을 했던 특이한 경험을 지닌 캐나다 현지인이다. 국제대학원을 다녀서 한국어를 잘 한다고 하긴 어렵다. 간단한 인사말 정도나. 물론 한글은 잘 읽는다. 뜻을 모르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가끔 너무 유려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읽어낼 때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 친구의 외형은 말 그대로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전형적인 서구형 외모다. 도대체 왜 한국으로 유학을 왔었는지 물어보면,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웃으면서 답한다. 그 친구가 자신의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자주 농담 삼아하는 말 중 하나가 “미.국.사.람.아.닙.니.다. 캐.나.다.사.람.입.니.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자꾸 헷갈려하는 것에 대해 살짝 불쾌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들에게 미국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중국의 이미지와 꽤나 비슷하게 보였다. 좀 순화해서 언급할 수 있는 말들만 옮겨 쓰자면, ‘어디서나 눈에 띄고 좀 더 크게 말하는 편’이라나. (현재 미국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B도 자신이 캐나다인임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의견을 말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들은 캐나다인이라 좀 더 예의 있게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며, 이들의 문화적인 다양성과 포용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더라. 물론 이건 내가 외국인이라 외국인에게 자신들의 장점을 부각하듯 말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미국과 자꾸 혼동을 갖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무척 싫어하는 것은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런데 여기에 최근엔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어서 여기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감도 적잖이 커지고도 있더라. 


“시의원을 뽑는데 공약이 '나는 중국인이다. 중국인이면 중국인을 뽑아라'라고 하더라. 이게 정말 말이 되나?” 


얼마 전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캐나다 현지인 친구도 보았다. 이곳 시민이 아니라 공약이라든가 투표라든가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 실제 스토리는 잘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들을 당시,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캐나다에 와서 시민으로서 선거든 투표든 하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역시 어디나 어느 곳이나 그 안에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고도 보이더라.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꼭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통조림 공장이었다가 지금은 관광지인 걸프 오브 조지아 캐너리


부동산 가격이 솟구치고, 거리의 슈퍼카들이 과속 운전을 하고, 양보 없이 클락션을 울려대고, 학원 등이 늘어나며 교육열이 점점 격해지는 풍경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 주체가 원래 현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들이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의 근원인 듯하다.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에 적잖이 아쉬움을 갖고 있는 나라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나 낯선 땅에서 이렇게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친구들을 만나 비슷하게 성토를 할 수 있다는 것과 서로에게 작은 공감과 위안을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좀 신기하기도 하다. 어쨌든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맥주 한잔에 안주로 질겅질겅 씹어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리치몬드 스티븐스톤의 명물, 스티븐스톤 피자


그러고 보니, 현지 친구와 함께 술을 파는 Liquor Store에 가서 맥주를 고를 때가 생각난다. 칭다오를 고르는 나에게 


“오, 안돼. 중국 맥주!”


버드와이저를 고르는 나에게,


“흥? 미국 맥주?”


이러더니 캐나다 맥주를 고르더라. 그 날 캐나다 맥주를 마시며 안주 삼았던 것이 아마도 위의 그런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한국 맥주가 필요했는데, 이곳 리큐어 샵에는 한국 맥주는 없더라. 다음엔 한인 마트에서 미리 사서 저장을 해두는 것으로. 그리고 ‘이번엔 한국 맥주야’하며 권해야겠다. 



*그동안 부족한 연재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오늘도 캐나다는 니하오>는 일단 마무리를 짓고요. 다른 브런치 글을 통해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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