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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치사해서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

by 윤희웅

‘더럽고, 치사해서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 인생 말년, 스페인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콜럼버스가 분노한 나머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콜럼버스의 성정으로 보면 아마 이보다 더한 욕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콜럼버스는 흔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메리카는 무인도가 아니었고 원주민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라는 말은 선민의식 가득한 유럽인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 나는 이런 일방적인 시선, 또는 강요된 시선들이 싫다. 요즘은 미국 교과서에 발견하다(discover) 보다 만나다(encounter)로 서술하기를 권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콜럼버스를 만나러 세비야 대성당에 가고 있다.

“이 골목길 텔레비전에서 봤어. 정형돈이 골목 끝에서 입을 벌리고, 감탄했거든.”

“아빠에게는 텔레비전이 애인이지?”

“그럼, 애인이자 친구지. 그리고 스페인 오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방송을 봤겠니?”

“백수가 좋네. 대단하십니다.”

골목 끝에 섰을 때, 정형돈이 했던 반응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끝을 모르는 거대한 성당의 위엄에 압도당했다. 세비야 대성당에 온 적이 있던 가이드인 딸도 입구를 찾지 못했다. 성당 외벽을 따라 돌고 돌아 간신히 입구를 찾았다.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펼쳐진 엄청난 규모의 중앙 홀. 로마의 바티칸과 베드로 대성당을 경험한 나는 세비야 대성당의 규모를 나름 짐작했지만, 성당 내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화려함에 빈혈이 올 정도였다. 입을 반쯤 벌리고 성당 내부를 둘러봤다. 내부에 관람객이 많았음에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압도적인 넓이와 층고, 곳곳에서 쏟아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화려한 빛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세비야 대성당은 한마디로 웅장했고, 거대했으며, 분위기에 압도당할 만큼 화려했다. 거기에 보너스로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의 향연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웅장한 성당 내부를 꽉 채운 예술품들이었다. 벽과 천장 모두 살아있는 숨쉬는 박물관이었다. 가름할 수 없는 신앙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조각상의 화려한 의상이나 수많은 표정, 벽의 작은 장식 하나에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성경에 얕은 지식만 있으면, 모든 작품이 쉽게 이해되고, 감동받을 수 있었다. 살바도르 성당을 황금성당이라 불렀지만, 세비야 대성당은 황금 덩어리 성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황금 제단은 화려했다. 콜럼버스가 가져온 황금 20톤이 벽을 가득 메웠다. 예수의 생애를 황금으로 조각해 놨다. 아마 황금 이어서 그런지 황금 제단은 철장으로 막혀 있었다. 철장이 시야를 가려 자세히 보기 힘들었다. 철장 너머로 손을 내밀어 일단 급한 대로 사진을 찍었다. 황금 제단 내부에 장의자에 앉고 싶었다. 반쯤 누워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관리자가 철장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이드를 따라 철장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따라 들어가려고 하니 관리자가 고개를 저으며 차인표처럼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빠, 콜럼버스 무덤 봤어? 저기에 있어.”

“이 사람이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네. 단체관광객 같은데 이럴 때 단체가 좋네. 아쉽다.”

“콜럼버스 관을 든 네 사람 중에 앞에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뒤에 두 사람은 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줄 알아?”

“내가 말했잖아. 여기 오려고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다니까. 그럼 너는 콜럼버스가 2차 원정에서 당도한 히스파니올라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알아? 콜럼버스가 오기 전 섬 인구가 30만 명이었어.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10만 명이 죽었고, 나중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았어. 결국 원주민은 전멸 했고, 혼혈만 남았어.”

“왜 죽였는데?”

“바보 같은 콜럼버스는 그곳이 황금의 땅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원주민들에게 없는 황금을 가져오라고 했고, 할당량을 못 채우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어. 콜럼버스가 얼마나 무도하고, 잔인한 사람인지 몰랐지? 그게 승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가르쳐서 그래. 콜럼버스의 시신 일부가 있다고 전해지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당당하게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설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어. 현지인들은 ‘그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천벌입니다.’라고 조롱했지.”

“텔레비전에서 봤어?”

“응, 텔레비전에서 봤지.”

“텔레비전이 큰일 했다. 텔레비전이 더 이상 바보상자는 아니네.”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마지막 코스로 히랄다탑에 오르면 된다. torre de la giralda. 히랄다 탑이 아니었다. 지랄다 탑이었다. 98미터를 끝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가는 지랄 같은 탑이었다. 올라가는 중 가끔 만나는 창문이 반가웠다. 창문에 붙어서 세비야 시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보기에는 시내전경관람보다는 숨을 고르는 시간 같았다. 그만큼 34층은 오르기 만만치 않았다. 예상대로 탑의 정상은 좁았다. 한 바퀴 도는데 몇 분 밖에 안 걸렸다. 그래도 전망은 좋았다. 세비야가 전부 내 발밑에 있었다.

“종 치기 전에 내려가자. 바로 머리 위에서 종을 치면 귀청 떨어지겠다.”

“아빠, 옥상 수영장에서 선탠 하는 사람들 보여?”

“사생활이 없네. 다 보인다. 여기 사람들은 신경 안 쓰나 봐.”

“누드비치가 있는 유럽인들 이잖아.”

“여기가 왜 34층인 줄 알아?”

“몰라?”

“내 생각에는 예수님이 33년 살았잖아. 그래서 34층 같아.”

“그럼 33층이어야 맞지. 여기는 34층 이잖아.”

“원래 1층은 없는데 만든 거야.”

“누가 그래?”
“그냥 내 생각, 그럴듯하지 않아?”

“없는 이야기 만드는 것 보니까 역시 작가네. 그만 내려가자.”

“다음은 어디야?”

“세비야 대성당 오렌지 정원입니다.”



lovepik-spanish-seville-cathedral-exterior-picture_501392702.jpg 세비야 대성당과 마차 (구글펌)
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1607250951424260793_20160725095220_01.jpg 황금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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