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계엄 이후 전국 곳곳에서 '비상 행동'이라는 모임이 생겨났다. 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산 비상 행동'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시민단체들이 하나로 뭉쳤다. 서울집중집회에 가는 전세버스를 마련하고, 매주 수요일 중앙역 광장에서 촛불 집회를 열었다. 첫 번째 난관은 전세버스를 마련할 자금이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차비로 만 원을 받기로 했다. 부족한 금액은 비상행동 참여 단체들이 각출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버스비가 더 걷혔다. 버스비로 이만 원, 많게는 오만 원. “오늘 못 가서 미안해요.”라며 버스비만을 보태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행동하는 양심들의 힘이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힘들이 모이면 세상이 쉽게, 빠르게 바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탄핵이 후 시간이 지나면서 대통령은 말을 바꾸고, 장관들은 꼬리 자르려 들고, 정치인들은 옹호하며, 줄 서기 바빴다. 목사님들은 신도들을 동원해 맞불을 놓고. 이러다 정말 잘 될까?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비상 행동에 정말 비상이 걸렸다. 잘못하면 탄핵이 흐지부지 없던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우리는 격주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찾았다. 출, 퇴근시에 거리 선전전도 하고, 주요 거점에 플랑카드도 걸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매주 수요일 안산 중앙역 광장에서 진행하는 수요 집회였다. 이번 주 수요 집회는 1월 22일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 집회와 같이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회의를 진행하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기분이 상했다. 장애인 인권과 이동권 이야기는 모두가 동의하고 동참하면서, 같은 장애인인 농아인 이야기는 없었다. 항상 그랬다. 나는 회의 도중 손을 번쩍 들었다.
"1월 22일 추모 집회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참여할 겁니다. 그런데 장애인 분과에서 다루는 장애인은 청각이 들리는 장애 인 뿐이네요. 같은 장애인인 농아인들은 12월 3일 탄핵 발표 때도 수어 통역이 없어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습니다. 밤늦게 카톡으로 소문을 주워 담아야 했습니다. 서울집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어 통역이 매번 함께하지 않습니다. 농아인을 위한 수어 통역이 없다는 건 장애인 안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행동이고, 또 다른 장애인 불평등입니다. 저는 안산 촛불 집회에 수어 통역을 요청합니다!"
이 문제는 안건으로 채택되어, 가결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집행부에서 날 찾아왔다.
"수어 통역사를 못 찾았어요."
“……네? 그럼 어쩌죠?”
나는 수어 통역사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집회 통역은 해본 적이 없었다. 병원이나 직장에서 통역하거나 농인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부랴부랴 지인들을 동원해 프리랜서 통역사를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수어 통역을 요청한 내가 해야만 했다. 그날부터 뉴스를 보면서 생소한 단어들을 외우고, 발언문을 미리 받아 연습했다. 그리고 집회 날,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사회자 옆에 섰다. 처음에는 예상보다 괜찮았다. 연습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자유 발언 시간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원고 없이 즉흥으로 발언하는데, 발언자가 감기로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다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행히 발언이 짧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발언자가 나왔다. 어르신이었다. 횡설수설. 같은 말을 반복. 마무리가 안 된다. 내 땀샘이 다시 폭발했다. ‘아,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고, 집회가 끝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는 못 하겠다…’
집회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켜니, “수고했어요.”라는 인사들이 와 있었다. 그중 농아인 친구가 보낸 카톡이 눈에 띄었다. 내가 수어 통역하는 사진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멋지고, 고마워.”
봤구나.
그때 카톡이 하나 더 왔다.
“윤 선배님, 시민들 반응이 너무 좋아요. 다음 주도 해줄 수 있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럼요. 보는 사람이 있는데 당연히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