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면 생기는 일

by 윤희웅

잘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뜬금없는 SNS 문자를 받았다.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녀와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을까? 아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을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였지만 슬퍼 보이는 눈동자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무슨 슬픔이 그렇게 가득 찼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였다. 들꽃처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소박하고 예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요일에 저랑 소풍 안 가실래요?

분명 잘못 보낸 문자라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이런 문자를 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의 문자에 소풍이라는 단어가 나를 설레게 했다. 오랫동안 잊으며 살아왔던 단어였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올랐다.


-저는 바다가 보고 싶어요. 사람이 별로 없는 바다.

-문자 잘못 보내셨네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소풍 같이 가는 사람은 좋겠네요. 즐겁게 지내세요.

-선생님하고 같이 소풍 가고 싶은데.

-저요?

-네. 아직 여름휴가를 가지 못해서요. 여름휴가 가셨어요?

-저는 매일 휴가라 따로 가지는 않았죠.

-그럼, 저와 바다를 보러 가요.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나와 소풍? 무슨 일일까? 왜 그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소풍을 갈 이유는 없었다.


-작년 여름, 새벽에 출발해서 하조대에 갔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다를 거닐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올라왔어요. 제가 커피랑 샌드위치 준비할게요.

-하조대면 강원도를 말하는 거죠? 거기는 소풍이 아니라 여행이네요. ㅋ 죄송하지만 제가 아직 선생님을 잘 몰라요. 이해하시죠?

-드릴 말씀도 있고, 제가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무섭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위로받고 싶어서요.

-수술받으세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간단한 수술이라도 사실 두렵네요. 그럼 차 한잔 정도는 괜찮죠?

아니 도대체 내가 목사님이나 신부님도 아니고, 나에게 무슨 위로를 받고 싶고, 또 드릴 말씀은 뭘까? 지역에서 오가며 얼굴을 자주 볼 텐데 소풍은 힘들어도, 차 한잔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드릴 말씀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차 한잔은 좋아요.

-그럼, 점심같이 할까요?

-점심 약속이 있어서 오후에 차 한잔하시죠?


나이가 들어서일까? 점점 겁쟁이가 되어갔다. 점심을 먹자는 이야기에 없던 약속이 생겼다. 점심시간이 지난 카페는 한적했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사실 돈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어요. 다만 엄마가 되어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었죠. 가난은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곰팡이 같았어요. 아이와 함께 삶을 마감하려고 생각했죠. 그때 저는 ***을 만났죠. 저에게 희망이 되었어요. 이제 저는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었어요. 선생님은 말씀도 재미있게 잘하시고, 인맥도 넓으니 잘하실 것 같아요. 저와 함께 새로운 제2의 인생을 만들어봐요.”

“*** 다단계 회사잖아요. 저보고 다단계가 어울리니 같이 하자는 말씀이시죠? 제가 퇴직금도 있고, 이왕이면 사무실 하나 차릴까요?”

“사무실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사무실을 차리면 수익은 몇 배가 되죠. 역시 선생님은 다르시네요.”

“죄송하지만 저는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사실 저는 죽지 못해 살고 있어요. 제가 겁쟁이라 죽는 게 무섭고, 또 내 죽음이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주는 것이 싫어서 그냥 사는 중이에요. 저를 생각해서 돈 벌게 해 주겠다는 말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세상이 참 무섭구나. 직장생활만 30년,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 세상은 나만 빼고 잘 돌아가고 있었다. 속고 속이고, 물고 물리며 세상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길가 구석에 숨어있는 겁에 질린 돌멩이 하나가 보였다. 굳이 길 가운데로 꺼내 발로 힘차게 찼다. 돌멩이 주제에 고고한 척 숨어있지 말고 발에 치이며 굴러다녀라. 이제 나의 모습은 길가에 치이며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될 것이다. 데굴데굴 굴러간 돌멩이가 또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씩씩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또다시 길 가운데로 돌멩이를 차버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에이, 쪽팔리게 괜히 설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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