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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Oct 29. 2022

빨리 철들지 마, 속상하니까

경험과 환경이 만들어 낸 눈치 빠른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내가 눈빛만 보내도, 한 마디만 꺼내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놀라울 정도로 금세 알아차린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R조차도 나의 표정과 어조, 목소리 크기만 들어도 화가 났음을 헤아리고 하던 행동을 멈춘다.


  눈치가 빠른 아이들 덕분에 교사인 나로서는 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문득 우리 아이들이 왜 눈치가 빠른 건지 생각하다 보니, 마냥 편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한국어 능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쏟아지는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분위기를 파악하며 '눈치껏' 알아들어야 하니, 눈치껏 파악하는 능력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으로의 이주 과정이 쉽지 않았던 아이들은 특히 눈치가 더 빠른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지내왔을 테니,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온 H는 어렸을 때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님과 3년간 떨어져 살아야 했다. 돈을 버시기 위해 한국에 먼저 오신 어머니가 H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고 어떻게 사셨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 H는 어른들의 고단함과 경제적인 문제에 눈이 밝다.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부모님도 자주 다투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H는 돈에 관한 문제에 굉장히 민감했다.

  하루는 교외로 현장 체험 학습을 가기 위해 교통비가 필요했는데, T가 교통 카드를 가져오지 않아 현금을 주기로 하고 H에게 카드를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환승하는 과정에서 환승 처리가 되지 않아 교통비가 추가로 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H는 체험 학습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교통 카드에 잔액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투덜거리면서 짜증을 냈다. T가 추후 현금을 줄 것이라고 달래 보아도 H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잔액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혹시 부족하면 부모님께 조금 더 달라고 할 수 없는지 설득해도 물어보니, 더 달라고 요청을 하면 H의 표현으로 엄마에게 '뒤진다고' 했다. H의 계속되는 짜증에 지칠 뻔했지만 H의 이주 배경과 가정환경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이 짠했다. 다른 아이들은 준비물이나 교재 산다는 뻥을 치며 뻔뻔하게 용돈을 더 타기도 하는데, 친구를 도와주느라 차감된 교통비를 받는 것마저 이리 눈치 봐야 한다니.


  이 날 함께 체험 학습을 갔던 J도 덩달아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체험 학습이 끝나고 배가 고플 것 같아 빵을 사주려고 빵집에 갔다. J가 대뜸 비싼 걸 사도 되냐고 물었다. 웃으면서 얼마나 비싼 걸 사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 지갑 사정 생각해서 적당하게 사라고 했더니 J가 심사숙고하며 빵을 골랐다. J가 골라온 빵은 4,800원짜리 데니쉬 식빵이었는데,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빵을 골라와서 조금 놀랐다. "J야, 너 이 빵 좋아해?"라고 물으니, J는 역시나 그 빵이 좋아서 고른 게 아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이럴 때 가족이랑 나눠 먹을 수 있는 큰 빵 사야 해요." J의 말을 듣고 진열된 빵들을 주욱 훑어보니 데니쉬 식빵은 가성비가 좋은 빵이었다. 비싼 걸 고른다고 했으면서 4,800원짜리 큰 빵을 골라온 J를 보니 가슴이 탁 막히는 듯했다. 참고로 필리핀에서 온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J는 H보다 눈치가 더 빠르다.

 

  이제 고작 중학생인 아이들이 이렇게 눈치가 빠르고 철이 들어서 될 일인가. 더 이상 눈치 빠른 아이들의 모습이 기쁘지 않다. 얘들아, 너무 빨리 철들지 마. 속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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