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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l 21. 2023

교사의 의문과 혼란 : 정말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걸까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바라보며 그토록 열심히 사셨나요

 다른 이들에게 난 다양하게 무언가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내 삶을 돌아본다면, 나도 그러한 시선에 대해 일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다양하게 이것저것 해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꾸 무언가를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고, 그로 인해 삶의 활력이 채워질 때가 많으며, 내게 의미 있는 경험과 자신감을 줄 가능성이 높은 일들이라면 힘이 닿는 한 많은 것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다.

  

 또한, 내게 주어진 일은 가능하다면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은 사람이다. 물론 완벽하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의 완벽이겠지만, 어쨌거나 대충 하기보다는 뭐든 열심히, 잘 해냈을 때 자기 효능감과 만족을 느끼는 편이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조금 받더라도, 내겐 성취감과 자기 효능감이 가진 힘이 더 셌다.


  이러한 천성은 교사 임용이 되고 나서도 발현되었다. 연수, 지원단, 연구회, 강의, 대학원, 취미로서의 운동 등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거나, 해서 도움이 될 만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일단 해보곤 했다. 업무 측면에서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기존에 했던 것보다는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것을 선호했다.


 첫 학교에 근무할 때, 퇴근 후 신청해 둔 연수를 들으러 간다는 나의 말에 선배 선생님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피곤하겠다, 힘들겠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냐, 뭐 하러 그렇게 연수를 열심히 듣냐, 길게 가려면 적당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 열심히 하면 나중에 지친다는 말들이 주로 돌아왔다. 다문화 학급 운영을 위해 주어진 예산으로 재미있을 만한 새로운 시도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무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연수를 듣거나 무언가를 시도하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다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의 평균치보다 높긴 했을 테다.

  

 선생님들의 반응을 들을 때면 상반되는 두 가지 마음이 일곤 했다.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나는 저렇게 적당히 안주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라는 반감, 그리고 한편으로는 '굳이 이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건데 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 반감과 의문이 부딪힐 때면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천성대로 '일단 해보는' 쪽을 선택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선택 끝에는 대부분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길 잘했다'라는 생각과 격려가 나를 마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도전한 것들에 대한 확신이 부쩍 옅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미래 교육의 흐름에 어울리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등록한 교육대학원은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특히 이번 학기에는 교수님 자랑만으로 실컷 채워진 성의 없는 강의, 수강생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했음에도 진도를 이유로 일방 통행하시던 교수님의 강의를 몇 차례 듣다 보니 학기가 끝나고 말았다.


 오랜 버킷리스트였기에 도전했던 교과서 집필은 교과서가 지닌 특유의 보수성과 엄숙성에 치이고 치여, 출발할 때에 꿈꾸었던 우리 집필팀만의 개성이 옅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또는 '교과서스럽지' 않고 좀 더 실제와 맞닿아 있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낸 아이디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깎이고 깎여 그저 무난하고 단조로운 모양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날들이 반복되니 개인적으로는 회의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더라도 다소 무기력한 태도로 임하게 되었다.


 세상에 내가 뜻한 대로 펼쳐지는 것이 몇 가지나 되겠냐마는, 나름대로 큰 기대를 품고 도전한 것들이 실망과 허무함을 안겨주던 찰나, 비보를 듣게 되었다. 늘 맨 앞자리에서 대학원 수업을 열심히 들으시던 대학원 동기 선생님이자 선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1년 남짓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배우시려는 열정적인 분이라는 사실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분의 뒷자리에 앉아 교수님 눈을 피해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카톡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교수님의 자잘한 말씀마저 받아 적으셨다. 선생님께서도 나와 같은 인문 교과이신 데다가 나이도 조금 있으셨던지라 교수님의 일방적인 수업을 다 이해하시기 어려웠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점 없는 눈으로 교수님의 소리만 귀에 넣고 있을 때 그 선생님께서는 chat GPT로 생소한 용어를 찾아가시며 뭐라도 얻어가려 노력하셨다. 그 모습을 알아차릴 때면 내가 한심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있는 건지 자문할 때도 있었다. 내가 아니었어도, 그분을 잠시나마 마주했던 분이라면 열심히 사는 분임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러웠다. 몇 주 전만 해도 함께 열심히 해보자며 독려해 주셨던 분이었으니까. 1급 정교사 연수를 들었던 올 겨울만 해도 강사님으로 오셔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던 분이었으니까. 차라리 지병이 있으셨던 걸까, 혹시 누군가가 못된 장난을 치느라 이런 카톡을 보내온 게 아닐까, 이미 침울해지기 시작한 기분에 잠겨 마음으로는 그분의 부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머리로는 별 생각이 다 들던,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놀랍게도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동 교과 선생님께서도 그분을 알고 계셨다. 같은 교과와 학교급이 아님에도 말이다. 내가 알고 있던 이상으로 그분께서는 다방면에서 활동을 활발히 하신 듯했다. 그리고 근래에 일을 참 많이, 열심히 하셨으며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셨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게 되었다.


 부고를 들은 다음 날 퇴근 후에 들른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봐 오고 느꼈던 선생님의 단편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동료와 후배, 학생들이 안타까워했고, 슬퍼했고, 울었다.

 

 선생님께서 회의와 의문을 남기고자 하심은 아니었겠으나, 그 밤 이후 며칠간 알 수 없는 허무함에 젖어 있었다. 일단 달리는 쪽을 선택해 왔던 나는 무작정 달리기가 어려웠다.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우선 물어봐야 했다. 내가 달려가려던 방향은 어디였는지, 달리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일단 도움이 될 것 같아 욱여넣었던 자잘한 것들, 내 선택을 저버리기 싫어 꾸역꾸역 참으며 했던 것들이 과연 나의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시간을 두고 답을 찾은 뒤 무리하지 않게 발걸음을 떼야할 것만 같았다.


 지난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이루어졌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난 학교에서 너무 애쓰다가 번아웃에 힘들어했던 시간들,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던 순간들, 힘에 부쳐 집에 와서 많이 울었던 시간들, 그리고 최근에 힘에 부친다고 느꼈던 날들. 그날들이 내게 전하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많은 선배 선생님들이 신규 교사에게 왜 '적당함'을 강조하셨던 것인지 차근히 곱씹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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