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말고 힘내자'만이 최선일까?
'언니... 이게 남극이래'
울상인 이모티콘과 함께 동생이 보내온 링크를 클릭했다. 남극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는 기사였다. 남극에 위치한 세종과학기지가 허허벌판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극에서 갈길을 잃은 찬 바람이 내 마음을 휙 쓸고 지나가는 듯 오싹해졌다. '정말 큰 일이네요', '이런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기사 아래에는 경각심을 잔뜩 느낀 댓글도 많이 보였다.
후에 좀 더 알아보니 세종과학기지가 위치한 지역은 하절기에 평균 영상 1~2도 정도를 유지한다. 때문에 눈이 녹아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동생이 보내온 기사는 다소 과장된 듯도 했다. 그러나 올해 남극에서는 예년과 달리 지난 하절기에 영상 7~8도 정도의 고온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동절기인 최근에도 눈 대신 비가 내리거나, 빙하가 빠르게 유실되는 등 이상 기후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남극에 무언가 작지 않은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최근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에든버러대, 리즈대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년 동안 남극에서 사라진 얼음은 총 28조 톤에 달한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코로나 19 국면, 그리고 질세라 시간차 공격을 했던 장마와 태풍. 그로 인해 다들 주문처럼 '지치지 말자'는 응원을 서로 주고받았다. 나 역시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버티자'면서 격려의 말을 습관처럼 건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이제 좀 지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만 버텨야 하는 것 아닌가?
유례없는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수개월째 일상이 마비됐다. 건강에 대한 환상이나 식욕에 눈이 어두워진 인류는 급기야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비집고 들어가서 잘못된 접촉을 했고, 현재까지 이것이 코로나 19 발원의 가장 강력한 이유로 꼽힌다. 지난여름 많은 피해를 낳았던 폭우에 대해서 많은 기후, 환경 전문가들은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우리의 몸을 적시는 비가 녹아내린 빙하의 흔적일지 모른다. 남극 여행을 막연히 꿈꿔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아니었다.
이 비극적인 상황들은 그저 꾹 참고 버틴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상상해 본 적 없던 지금의 재난에 환멸을 느끼고 진절머리를 칠 때가 되었다. 부글부글 한 번은 끓여내고 나서,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인지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환경에 대한 끊임없는 훼손과 다른 생명들에 대한 착취를 딛고 올라서 있는 우리의 삶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지치지 않고 잘 버틴다고 한들 이다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강한 바이러스, 더 극심한 환경 재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리가 거를 수 있는 것들은 일상에서 하나씩 걸러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지구를 망가뜨리는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매일 숨만 쉬는데도 다 쓴 일회용 마스크가 나풀나풀 책상 위에 쌓이고, 밥을 먹을 때마다 주문할 생각 없었던 플라스틱 용기가 그득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어서 집어 든 라면이나 과자 속 약간의 '팜유' 때문에 오랑우탄의 서식지가 깡그리 벌목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것까지는 어쩔 수 없잖아'라고 하면서 타협을 하기도 하고 나와의 싸움에서 지기도 한다. 훼손과 착취로 촘촘히 짜인 세상 속에서 나 하나가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발버둥 친다고 해서 달라질까, 막막해지는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 동물성 소재나 동물실험이 없는 제품을 골라 쓰고, 쓰레기를 줄이려고 버둥거리는 나에게 누군가는 '그렇게 사는 거 힘들지 않아?'라고 묻는다. 소심한 성격까지 타고난 탓에 누군가에게 '안 먹을래요', '안 할래요'라는 말을 한다는 것부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육식을 하지 않고, 환경을 고려하는 삶을 지향하면서 나에게 불필요한 것들이 하나씩 걷히기 시작했다. 안 하는 것들이 명확해지니 굳이 과도한 선택지 속에서 헤매면서 끙끙댈 필요가 없다. 거절을 잘 못하고, 싫어도 이유를 몰라서 참고 버티던 과거에 비하면 아닌 건 아니라고 웃으면서 거부할 수 있는 단순하고 선명해진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 꼭 고기 안 먹기, 자연인으로 살기처럼 거창한 변화를 목표로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생활 속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의 싹이 틔워진다. 과도한 영양 섭취가 오히려 몸에 탈을 내듯이, 과도한 가능성에 시달리는 우리의 마음에도 디톡스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많은 음식, 쓸모없는 물건들, 너무 많은 선택지 속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면 채식, 그리고 채식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권해본다. 덜 중요했던 것들이 걸러지면서 가벼워지는 느낌이 안겨주는 경쾌함. 믿고 거르는 즐거움을 잘 다룬다면 달라져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분명히 마음에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