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이 되었는데, 갑자기 게임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인턴시절, 나는 언제나 비행기에서 막내였다.
그 시절 선배들은 막내들을 DG라고 불렀다.
Dangerous Goods(위험물)의 줄임말이었다.
한눈팔면 도어를 잘못 열어 슬라이드가 터져버리고
서비스할 땐 손님에게 물을 쏟거나 하기에
늘 예의주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
갑자기 나는 비행기에 올라오니 위험물이 되었다.
모든 선배님들이 신경을 곤두 세우고 나의 행동을 감지한다.
위험물 탐지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비행 내내
모든 선배님들의 눈치란 눈치를 다 보고 다녔다.
늘 눈치를 보면서 일하니 긴장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큰 비행기에서 그 수많은 C-BOX에 내짐 하나 넣을 공간 찾느라
앞치마와 내 파우치 들고 바쁜 선배님 옆에 서서 쩔쩔매던,
"그냥 아무 데나 알아서 눈치껏 넣으세요"
그 큰 비행기에 정 붙일 곳은 화장실이 유일했던,
그런 고만고만한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C-box(Container-box 비행기 물품 컨테이너)
그렇게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전원 아웃이었다.
침대에서 내리 12시간은 기절해 있었다.
밝은 대낮, 암막커튼에 숨어 드라큘라처럼
관짝 같은 나의 작은 1인용 침대에서 조용히 깊고 깊은 잠을 잤다.
해가 저물고 달빛 한줄기 들지 않은 깊은 굴속에서
좀비처럼 거실로 저벅저벅 겨우 기어 나와
무슨 정신인지 배고파서 밤 12시, 식탁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다.
머리는 산발에 민들레 홀씨가 되어서는
모두가 잠든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수 있는 것 뭐든 꺼내 식탁에 앉아 핸드폰 불빛에 비친 허연 얼굴에
초첨 없는 눈으로 오물오물 조용히 삼킨다, 그냥 공포영화다.
밥을 소화시켜야 하는 대단한 명분으로 난 아직 잘 수가 없다.
1년 치 끊어놓은 영어회화강의는 절대 들을 일 없고
군대 가서 비워진 남동생 방으로 넘어갔다.
배틀그라운드를 켰다. 그렇게 밤새 7시간을 했다.
헤드폰을 쓰고 총소리에 집중하며 M4 , Kar98 적의 무기를 예측하고
숲을 밟는 적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온몸에 긴장하며 살아남으려 애쓰며 게임을 했다.
해가 뜰 때쯤 다시 잠에 들었고 일어나면 낮 3시,
느지막하게 일어나선 끼니만 겨우 챙겨 먹고 또 게임을 했다.
그렇게 나는 게임 중독자가 되어갔다.
서로를 죽이고 치열하게 싸우는 생존 게임인 배틀그라운드,
게임 속에서는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나는
이 현실에서 뭘 하고 있는가 문뜩 그 생각이 스쳤다.
비행에서 제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날 같이 가는 선배들의 오늘 기분이다.
'그 선배, 남자친구랑 안 헤어졌나, 남편이랑 안 싸우고 왔나'
'식사는 하고 출근하고 온걸 까, 배고파서 예민한 건 아닐까'
비행기에서 내 몫 하나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인데
처음이라 방법을 잘 모르니, 그저 눈치만 보며 일했던 던 순간이었다.
남의 비위만 맞추느라, 점점 내 비위는 잃어갔고
매번 새로운 선배님들을 위한 맞춤 가면을 꺼내 썼다.
그 가면 매번 만들어서 쓰는 것에 꽤나 지쳐갔다.
그렇게 가면 쓰고 애써서 일하니 집만 오면 방전돼서 잠만 잤고
게임은 오래 하면 할수록 우울해졌다.
겉만 멀쩡했지, 속이 하나도 멀쩡하지 않았다.
어쩌다 몇 개월을 게임중독에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내 삶을 다시 천천히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비행기에서 매번 보던 눈칫밥이 아닌 엄마의 밥이었다.
일이 끝날 때쯤엔 엄마에게 늘 카톡 와 있었다.
"밥은?"
비행기에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내리기 일쑤였다.
바쁘면 승무원들은 식사를 하지 못한다. 근데 어찌 막내인 내가
감히 밥을 혼자 먹겠다 할 수 있을까, 배도 곪고 다녔다.
(아니 돌이켜보니깐, 나 왜 이렇게 불쌍해, 심난하네)
집에 오면 엄마가 고기를 그렇게 자주 구워줬는데
삐쩍 삐쩍 골아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맨날
고기반찬에 한상을 차려주셨었다.
그렇게 나는 밥의 힘으로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쌓이는 따뜻한 에너지를 천천히 느꼈다.
그러다 보니 이 좋은 에너지가 게임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까웠다.
자연스레 나는 게임을 줄였다.
조금씩 나의 속은 단단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남의 비위로만 채워 내가 존재하지 못했던 그곳에
미비하지만 내 자리가 다시 생겼다.
내가 즐거웠던 것들을 스스로 찾고 나아가
생산적인 것들로 내 삶을 채우기 시작했다.
운동도 시작하고 영어학원도 다녔고 나는 조금씩 내 자리를 늘려갔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회복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나와 같이 회사나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본인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그 안에서 썩 만족스럽지도, 그저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그래도 건강하게 '밥' 잘 챙겨 먹길 바란다.
나에겐 엄마의 집 밥이었지만 상황에 맞게 끼니 챙기길 바란다.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이 무너져야 할 때
스스로 아낄 수 있는 법, 그 시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
그저 잘 버틸 수 있게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
처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 다 힘들다.
언젠간 애쓰지 않아도 회사를 편하게 다니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드디어 본인을 위한, 본인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때 뮤지컬도 보러 다니고 좋아하는 책도 읽으러 도서관도 다니려면
그 시간을 온전히 나를 회복하는 데 쓰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누에고치가 예쁜 나비가 되기 위해 그전에 엄청 에너지를 비축한다고 한다.
번데기 안에서 꿈툴꿈툴 힘든 시기를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예쁜 나비가 되기 위해 지금 밥 잘 챙겨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말이 참 좋다.
참 따듯한 말이다.
"밥은?"
누가 저런 말하면 바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너무 아름다운 말 아닌가,
저 말은 솔직히 고백이 아닌가 싶다.
PS. 2화는 승무원이 되었는데 발을 잃었습니다만, 구두는 원래 이런가요 [발 냄새의 역사]로 찾아오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