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 나는 삶]ep.15. 양치

관계의 정의

by 정여름


그러니까 말이다. 요즘은 서로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기 전에는 시작한 게 아니라던데, 우리의 관계는 정의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인스러워졌다. 매일 다정한 언어들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주변 것들에 질투를 하기도, 주변에서 들어온 소개팅에 왠지 모를 죄책감과 책임감 사이의 감정을 느끼며 고사하곤 했다.


우리 관계를 정의하지도 않았는데, 미래를 약속하는 그의 말은 마치 아주 달디 단 디저트 같았다. 나중엔 치과에 가야 할 것만 같은 달콤함. 어느 날 본인이 나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짤막한 이유를 설명하며 이해해 달라는 그의 말에, 충치의 고통을 조금 느껴버렸다.



나는 더 이상 유치도 아닌 내 이를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이해할게 뭐가 있냐는 말에 그는 또 말을 돌려보지만, 나는 천천히 나의 생각을 전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내 사람이라는 범주안에 들 수 있는 관곈지 혼란스러워 심통도 부리고 했던 거 같아.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을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이해를 바랄 필요가 없는 거 같아."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왜 그러냐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출근해 버린, 일이 미친 건지 사람이 미친 건지, 누구랄 것도 없이 하드워커인 서로. "일단 쉬고 있어. 이따 얘기하자."라는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로 우리의 대화는 일단락 났다. 그는 11시간이 지나서야 퇴근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나는 밤을 꼬박 새 버리고 나서야 퇴근을 했다. 우린 일에 치여 서로의 관계를 정의할 시간도 없는 걸까? 아니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고 싶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그와 나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답을 찾진 못했지만, 관계의 정의란 무엇일까 싶어 꽤 허망한 밤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제한된 말들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우리가 감정에 기대를 해도 됐었다면 나는 당신에게 힘을 빼도 된다 얘기해 줬겠지. 손을 잡아줄 테니 힘 빼고 기대어 있으라 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닌 이상 기대하면 혼자 따스하다가도 차갑길 반복할걸 알아서 더 다가가지 못하겠네. 그러기 싫어."라고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자기 전에 틈내서 연락 한 번 해달라고. 바쁘고 피곤한 거 알지만 나를 보기 위해 남는 시간이 아닌 시간을 내어 달라고. 일정이 있으면 간단하게라도 알려달라고, 욕심낼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한데 말해버리면 애쓸까 봐, 혹은 지쳐버릴까 봐 무서워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요즘의 나는 봄날의 낮과 저녁처럼 혼자 따스하다가도 차갑길 반복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 당신을 이해하려 다가가버리면 영영 저녁에 머물러 버릴까 봐 그게 정말 무섭다. 아니 새벽에 갇혀버리면 어쩌지. 그때는 썩은 이를 뽑아버려야겠지.


나는 이렇게 관계를 정의하지 않은 대가로, 아주 긴 양치를 해본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치과가 가기 싫은 어른으로 성장해버려렸다.


keyword
이전 14화[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 나는 삶]ep.14. 괴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