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니까
얼마 전 3주라는 내 인생 가장 긴 휴직계(병가)를 냈다. 장기근속 휴가도 붙이고, 엄마 환갑휴일까지 총동원해 처음으로 4주라는 시간을 출근하지 않고 보내게 됐다. 경주마처럼 십 년을 열심히 달리다 내가 얻은 것은 몸과 마음의 병이었다. 하나가 괜찮다 싶으면 또 하나가 고장 났다. 대출해 쓸 젊음도 고갈돼가고, 패기와 영양제로 건강을 운운할 수 있는 시간도 지나버렸다.
입사 후 십 년 만에 처음 받아 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입원해서 수술도 해야 하고,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회사에서 보기 싫은 사람들에게서 해방될 시간도 충분히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고작 4주?! 그렇다. 사실 4주는 수술 후 체력만 회복하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그런데도 나는 병가기간 3주에 여타 다른 휴가를 붙여 오로지 4주만 쉬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 병가 관련 면담을 할 때 유달리 승진이 빨랐던 젊은 그룹장은 말했다. 나중에 주재원이나 여러 기회가 왔을 때 내 인사카드에 오랜 병가 이력이 있으면 그럴 리 없겠지만 0.1%의 확률로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죽을병이 아닌 이상 진짜 한 달 내외로만 쉬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나 역시 건강과 불안함 사이 4주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저 0.1%의 확률은 위협적이기도 했다. 작년 한 해동안 검사와 진료를 보는 중에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만성 불면증도 아니고, 쉽사리 조절되지 않는 호르몬도 아닌 '혹시 모르니까...'였다. "별 문제없는 결절로 보여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직검사를 해봅시다."라는 말부터 검사 결과를 받기까지의 시간은 유달리 쓰라린 억겁이었다.
"속이 꽉 찬 남자 99.9 사랑도 99.9 ~ " 1994년 발매된 배일호의 노래를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는 나는 벌써 15년 전 수능시험을 치렀다. 내신을 밑도는 수능성적이 영 맘에 들지 않아 재수까지 했더랬다. 시험 범위가 정해진 내신과는 달리 수능을 준비할 때면 곧잘 '혹시 모르니까..' 늪에 빠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치렀던 수능시험에도 혹시 몰라 공부한 범위에서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다.
지금 수술을 잘 받고 회사 밖 세상을 구경하는 나에게 4주라는 시간은 짧기만 하다. 앞으로는 혹시 모를 걱정의 0.1%의 확률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의 범위에서 출제된 문제는 다 같이 틀려버리면 그만이고, 속이 꽉 찼다면서도 100%가 아닌 99.9%를 목놓아 부르는 그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