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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Nov 01. 2020

서러운 노을빛을 머금은, ‘한(恨)’

시시한 이야기 ⑨ 박재삼, ‘한(恨)’

한국에서 가장 익숙한 정서 ‘한(恨)'은 대관절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외국인 친구도 없으면서 괜히 '한'의 영역(英譯)을 고민하고 난리다. 

사전에 나온 'resentment(분함, 억울함)'나 'sorrow(슬픔, 비애)', 'regret(후회, 유감)'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 자고로 ‘한’에는 시간의 떼가 입혀져야 하거늘. 그리하여 해갈되지 못한 그것은 응어리로 가슴 한켠에 콱 박혀 애상의 삶을 인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박재삼의 ‘한’은 아마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 오래 묵은 사랑이었나 보다.

한으로 남은 그의 사랑은 나무로 치면, 감나무다. 그리고 그 감의 색깔은 ‘서러운 노을빛’이어야 한다. 까다롭다. 노을빛도 가지각색인데, 서러운 정서를 자아내는 컬러여야 하는 것이다.     


헌데, 한이 서린 그의 나무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버젓이 나서지도 못한다. 가지가 뻗어 봐야 저승길이라니. 살아생전 만나기는 글러버린 탓이다. 만에 하나 이승으로 환생한다 해도 사랑하는 이의 등 뒤, 그의 머리 위에나 겨우 뻗어볼까 말까다.     


하지만 어쩌면 그네가 심고 싶어 했던 나무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하면 시인 전생의 설움과 소망, 한이 고스란히 서린 그 열매의 빛깔을, 그 ‘서러운 노을빛’의 열매를 그네는 알아챌 수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 사람도 시인만큼이나 서러운 생애를 살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영원히 알아낼 수 없을 그 무지마저도 시인에게는 한으로 회귀된다.     


개인적으로 감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서러운 노을빛’의 감을 먹게 된다면 시인의 무덤앞에 기꺼이 배설(排設)하고픈 시다.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러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꺼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박재삼, 한, 춘향이 마음,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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