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의 시 '고리'가 건드리고 간 것
이 방엔 나와 모래시계뿐이다
나는 그것을 뒤집고
다시 뒤집는 일을 한다
머릿속이 우유로 가득 찬 느낌
눈앞이 흐려질 때마다
삶이 정말
이것뿐일 리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방은 복종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그의 목소리는 끈질기게 들려온다
그는 내 눈동자가 비어 있기를 원한다
작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가만 보니 테이블은 엎드린 사람 같다
모두들 버티고 있다
끊어낼 수 있어야 사랑이 아닐까
내일은 오지 않는 동안에만 내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답 같은 세계를 움직일 불의 고리가 되는 일
몸을 태워 부르는 노래들
이런 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그가 또다시 일을 도모하고 있다
그가 나의 발목에 체인을 감고 있지만
꿈이겠지
눈을 떠도
안대를 벗어도
불을 켜도
여전히 캄캄하다
- 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2019), '고리' 전문
우유처럼 뿌연 권태. 방은 세계이다.
이 세계는 모래시계를 끊임없이 뒤집는 '나'로 가득하다.
무수한 '나'들은 알게 될 것이다. 삶이 정말 이것뿐이라는 것을.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 텅 빈 눈동자를 작동시키며 이 세계에 복종하는 것.
'그'가 나를 끌고 도모하는 내일은 꿈 같은 죽음, 죽음 같은 암흑일 뿐.
불의 고리가 가져올 세계의 끝을 상상해본다. 종말은 늘 의심스럽지만 매혹적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가 떠오른다. 장대한 그러나 너무나 사적인, 지구와 개인의 종말. 불의 고리로 모든 고리를 끊는 것. 그러나 과연? 고리를 끊는다고 모든 것이 사라질까. 끝일까. 끝은 다시 시작일 텐데.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캄캄함은.
모두들 버티고 있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