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괜찮았다

전동균 - '그러나 괜찮았다'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되지 않았다.

담뱃재만 쌓이고

책상 위엔 귀를 뒤로 눕힌 채

눈 깜박대는 토끼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나의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멀리 걸어나간 생각들은

불 같고 얼음 같은 공기를 숨 쉬었다.


어디에도 길이 없는 벌판에 서 있는 일.

천둥에 놀란 나뭇잎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


이마와 쇄골 드러난 어깨에

주문(呪文) 같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잠깐, 먼 불빛이 비치기도 했다.

그때 내 모습이 여우로, 마른 물고기로

바늘엉겅퀴로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괜찮았다.

나는 나의 배후를 만났다.

잿빛 풀, 물방울 새, 불타는 돌.



-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그러나 괜찮았다', 창비, 34-35쪽




그렇지, 괜찮을 수밖에.


말이 잘 되지 않아도,

길이 없는 벌판에 서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내가 나의 바깥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면,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다면,

잠깐 먼 불빛에 내가 내가 아닌 무엇으로 바뀔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내가 나의 배후를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수밖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