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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Jun 08. 2021

"조금 더 곁에 있어 드리자"

[영화로 풀어가는죽음학 이야기2]/ 영화 "어느 가족"

- "조금 더 곁에 있어 드리자"

- 영화 "어느 가족", 감독-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사람이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으면 영안실(안치실)로 안치된다.  임종과 사망선고라는 황망한 상황에서 고인은 그렇게 황급히 안치실로 옮겨진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유가족은 염습이나 입관할 때 고인을 잠깐 다시 볼 수 있다. 그때를 제외하고 유가족은 고인을 볼 수 없다. 비록 숨을 거둔 육신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고인 곁에 있을 시간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가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이나 화장장을 어떻게 할 건지 묻는 남편에게 아내는 그럴 돈이 없다고 답한 뒤 덧붙인다. (실제로 그들은 돈도 없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 더 곁에 있어 드리자, 할머니도 외로우실 거야"  


같이 지내던 손녀는 죽은 할머니의 머리를 빗겨드리며 슬퍼한다.

죽어가는 순간 곁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1편에서 영화

 <히말라야>를 통해 다룬 적이 있다.(아래 링크 참고)

https://brunch.co.kr/@ujuboygpqn/26 


그런데, 죽음 이후 고인의 곁에 머문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슬픔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 아쉽다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별로 인한 상실감에 적응하는 과정인 것이다.


물론 며칠 더 고인 곁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이별의 슬픔은 장례식이 끝나고도 오랜 기간 때로는 평생 계속된다. 우리나라 유교전통에도 '시묘살이'라 하여 삼년상을 치르면서 부모의 무덤 곁에 초막(여막)을 짓고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외국의 일부 문화권에서는 장례기간 동안 고인을 유가족과 조문객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전시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죽음을 직접 접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죽음에 대한 것은 가급적 회피하고 서둘러 처리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출처 : 에듀넷

하지만 지금은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장례가 치러지면서 유가족이 고인의 곁을 지키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염습이나 입관식에도 가까운 직계가족만 참석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의 경우 대개는 참석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죽음을 직접 접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죽음에 대한 것은 가급적 회피하고 서둘러 처리하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좀 더 성숙된 사회,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좀 더 성숙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표현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사회가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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