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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해가 져도 나는 지지 않아

어스름색 속에 나는 쨍한 거야

by 다보일 May 05. 2024

  나는 맑은 날이 좋다. 여러 모로 좋다. 쨍하게 파란 하늘도 좋고, 그 하늘을 배경 삼아 살랑이는 나뭇잎도 좋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꽃들이 맑은 날에 미모를 뽐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런 날도 해는 지기 마련이다. 해가 지면 싫다. 사진을 찍어도 영 시원찮고, 어둠이란 건 예상 가능한 범위를 잔뜩 줄여서는 나를 겁먹게 만든다. 그래서 해가 지면 집안으로 쏙 들어가 온갖 불을 다 켠다. 잘 때도 불을 켜고 자는 이유다.


  그렇지만 걷기 운동은 해가 진 이후에 해야 한다. 내가 공황과 우울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존경하는 B언니는 내게 걷자고 했다. 근데 언니는 더운 것도 싫고, 퇴근하고 나면 해가 지니 나는 할 수 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걷는 건 몹시 어지럽지만, 어두우니 더 용감해지는 거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학교 욕을 하다 보면 속이 후련하다. 그러다 데이지 꽃을 봤다. 어둑하고 차가운 풀빛 속에서도 쨍하게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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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스름색이었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해가 져도 아무렇지 않게 쨍한 데이지가 고집스러우면서도 기특해 보였다.


  집 나간 지 17년이 된 아빠가 우리 집 주소를 알게 됐단 사실만으로 나는 매일 악몽을 꾸고 있다. 숨겨뒀던 나의 어둠이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데이지가 어스름색 속에서도 쨍하니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겁먹지 않을 것이다.


  맑은 날이 아니어도 나는 괜찮다. 괜찮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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