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색 속에 나는 쨍한 거야
나는 맑은 날이 좋다. 여러 모로 좋다. 쨍하게 파란 하늘도 좋고, 그 하늘을 배경 삼아 살랑이는 나뭇잎도 좋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꽃들이 맑은 날에 미모를 뽐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런 날도 해는 지기 마련이다. 해가 지면 싫다. 사진을 찍어도 영 시원찮고, 어둠이란 건 예상 가능한 범위를 잔뜩 줄여서는 나를 겁먹게 만든다. 그래서 해가 지면 집안으로 쏙 들어가 온갖 불을 다 켠다. 잘 때도 불을 켜고 자는 이유다.
그렇지만 걷기 운동은 해가 진 이후에 해야 한다. 내가 공황과 우울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존경하는 B언니는 내게 걷자고 했다. 근데 언니는 더운 것도 싫고, 퇴근하고 나면 해가 지니 나는 할 수 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걷는 건 몹시 어지럽지만, 어두우니 더 용감해지는 거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학교 욕을 하다 보면 속이 후련하다. 그러다 데이지 꽃을 봤다. 어둑하고 차가운 풀빛 속에서도 쨍하게 빛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스름색이었다.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해가 져도 아무렇지 않게 쨍한 데이지가 고집스러우면서도 기특해 보였다.
집 나간 지 17년이 된 아빠가 우리 집 주소를 알게 됐단 사실만으로 나는 매일 악몽을 꾸고 있다. 숨겨뒀던 나의 어둠이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데이지가 어스름색 속에서도 쨍하니 제 역할을 하는 것처럼, 겁먹지 않을 것이다.
맑은 날이 아니어도 나는 괜찮다. 괜찮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