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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언니 Jun 07. 2021

아빠와의 추억 4

아빠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아침마다 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차 안에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점수 매기기를 하며 놀았다. 영어도 가르쳐 주셨는데, “해야 해야 붉은 해야” 같은 한국의 전래 동요를 “sun sun red sun”으로 번역해서 가르쳐주셨다. 


아빠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서 일본어를 아주 잘 했는데 어린 시절 가끔 나에게 일본어로 된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낸 낸~~” 으로 시작하는 자장가의 멜로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 중에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으면 방문을 열고 밖에서 춤을 추셨다. 코에다 두 손을 대고 마치 나팔을 부는 것처럼 춤을 추셨다. 한번도 “공부 잘했다”, “서울대를 붙다니 장하다” 같은 칭찬은 안 하셨다. 다만 춤을 추며 공부하는 딸을 응원하신 것 같다. 


포항 제철 창립 멤버라 내가 5살이 될 때까지 포항에 사셨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지낸 기억이 없다. 아빠가 3개월 정도 회사를 쉬셨는데 나를 산에 데리고 다니면서 싸리 나무로 긴 빗자루를 만들곤 하셨다. 그리고 오골계, 꿩, 토끼, 오리 등을 사서 마당 한 구석에서 키우셨다. 


아빠는 곧 새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집에서 키우던 가축은 하나 하나 저녁 식탁에 올라왔다 ��


아빠는 형제 중 둘째였지만, 형제 중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른 형제들보다 벌이가 나은 편이었다. 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조카들이 대학에 갈 때 아빠는 조용히 목돈을 마련해서 주었다. 나의 사촌언니는 아직도 아빠가 도와준 걸 고마워 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스타일은 아니셨다. 그러나 성실히 일하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면서 그 사랑을 표현하신 것 같다. 아빠는 3주 전 소파에서 주저앉아서 고관절에 금이 갔다. 그럼에도 강한 정신력으로 재활 치료를 잘 받고 계시다. 며칠 전에는 일어섰다. 4~5개월 후면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아빠의 폐에 암 종양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최대한 자주 찾아뵈야겠다. 그리고 같이 맛있는 밥을 먹고 농담도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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