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언니 Dec 26. 2020

아빠에 대한 기억 2

봉선화와 황성 옛터

크리스마스에 회를  접시 사들고 친정 부모님 댁을 방문했다. 부모님은 나이가 많이 드셔서 식사량이 매우 줄었다. 그래도 다행히 회나 초밥은  드시는 편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책에서 읽은 것인데 크리스마스나 제야의 밤에 가족이 모여  해에 감사한 일을 이야기하는 의식을 하면  해를 따뜻하게 마무리할  있다고 한다. 매년은  해도 우리 가족은 종종 하는 편이다.

이번엔 특별히 동영상으로 남기기로 했다. 아빠와의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아빠는 요즘 목소리가   나온다. 주로 턱짓이나 손짓으로 이야기하신다. 그래도 어제는 기분이 좋으신지 말씀을  하셨다.

아빠는 원래 식사시간에 일장 연설(!) 하기로 유명했다. 저녁시간  가족이 둘러 앉으면 아빠는 어렸을  이야기나 우리에게 훈계하고 싶은 말을 길게 하셨다.

우리들은  이야기가 지루해서 엄마를 툭툭 치며  끊으라고 했고 엄마는 “자자 식사해요라며 이야기를 끊었다.

아빠는 당시 대학생인 언니 오빠들에게 “절대 데모하지 마라. 학생은 공부하면 된다. 어른들이 정치를 하면 된다라고 당부하셨다. 하루가 멀다하고 오빠가 다니던 연세대 정문은 뜯겨져 나가고 바닥에는 시위에 사용된 돌들이 나뒹굴던 시대였다.

예전부터 학생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작은 아버지 때문에 맘고생을 많이  아빠는 데모를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빠는 가끔  한잔을 하면 노래를 하곤 했는데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  가요인 “황성 옛터 즐겨 부르셨다.  노래 모두 구슬프고 처량한 신세에 대한 노래이다. 그러나 봉선화 2절에서 드디어 꽃이 피고 반전이 일어나는 부분을 매우 좋아하셨다. 심지어 나에게 2절을 적어달라고 하시고 외우셨다 

아빠는 일본 유학 시절 외롭고 힘든 시간이 많았다. 하루는 전차를 탔는데 일본 할머니 두명이 “아무개   딸이 조선인에게 시집을 갔대. 어떻게 조선인과 결혼할  있지?” 라며 조선인을 흉보는 말을 들었다. 아빠는 바로 앞에  있었는데 싸우지는 못하고 주먹만 부르르 떨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배앓이를 고쳐주고 싶어서 일본에 갔지만 바램과 달리 공대 기계과에 입학했다. 1950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3년간 국교가 단절되어 아빠는 한국에 건너   없었다. 편지도 보낼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연락을 했더니 할머니가 그동안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빠는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도쿄 근처 바닷가에 가서 “어머니 어머니 외치며 밤새 우셨다고 했다. 20 청년이 바닷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엉엉 우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

다음에 가면 아빠와 함께 “봉선화 불러봐야겠다. 다들 즐거운 연말 연시 보내시길!

이전 05화 아빠와의 추억 3 - 생노병사의 고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