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크는 아빠
내가 30대 중반 아내를 만났다. 그해 초 인사 발령으로 인해 지금 사는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이곳에 근무하고 있던 아내를 직장에서 만나서 사귀다가 그해 늦가을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아이를 나중에 가진 다던지 안 가진 다던지 하는 특별한 자녀계획을 가지고 있진 않았고 자연스럽게 아이는 갖는다는 생각을 서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몇 명 가진다는 구체적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나는 ‘두 명 이상이면 좋겠다.’라고 예전부터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맘대로 안 되는 줄 그때는 몰랐다. 결혼 후 시간이 흘러가는데 아이가 금방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바심이 나거나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들이 더 걱정하시지 않았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가 생기지 않자 우리도 조금씩 희망을 품었다가 실망했다가 하는 감정을 조금씩 느껴 갔다.
그러다가 결혼 후 만 3년이 조금 안 되었을 때 마침내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가 아이를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태교 일기’를 적었다. 아이의 태명은 ‘순산이’였다. 아내가 순산하길 바라는 의미였다. 그만큼 임신하면서부터 아내의 약한 체력이 걱정이었다. 임신 초기부터 심한 입덧을 하며 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무척 힘들어했다. 출산 시에는 아내가 더 힘들었다. 입원 한지 꼬박 만 하루를 진통하고 나서야 간신히 아이가 태어났다.
태교 일기에는 출산일, 기다리던 아이와 만나는 기쁨과 함께 아내가 위험했던 극적인 순간이 휘갈긴 글씨로 기록되어있다.
순산이는... 에 태어났다. 축하해. 반가워 순산아. 몸무게 확인하고 태아 이동 차량에 들어갔다가 싸서 나한테 안겨줬다. 묵직하니 기분이 좋았다. 울지도 않았다.
...
병실에 가서 보니 ㅇㅇ이가 누워있었다. 고생했다고 말해줬다. 말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때 갑자기 ㅇㅇ이 소리치며 울렁거린다며 토를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게 없어서 위액과 침만 나왔다. 그리고 하혈하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이다. 난 순산이 나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다시 긴장이 몰려왔다. 가족들도 나가 있으라 하고 뒤처리하는데 피가 바닥에 조금 흥건했다. 긴급히 자궁 수축하는 약 투여했다. ㅇㅇ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이를 덜덜 떨었다. 얼굴은 하얘졌다. 이불을 세 겹 덮이고 따뜻한 담요를 다시 덮였다. 그래도 떨리고 혈압은 급강하해서 혈압계는 경고음을 계속 냈다. 내가 얼굴을 가져다가 입김을 불며 몸을 마사지시켰다. 의사가 오시더니 수혈을 해야 한다고 한다. ㅇㅇ는 수유에 지장이 있고 의심이 된다며 불안해했다. 간호사는 안전하게 검증된 거라고 하고 산모가 우선이라며 교수도 수유에 지장 없다고 해서 맞기로 했다. 수혈하면서부터 몸의 떨림이 줄어들고 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수혈을 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태교 일기는 아이가 태어나서도 계속 이어져 ‘육아일기’가 되었고 출생 후 약 1년간은 꾸준히 적었다. 지금 보니 소중한 기록이 된 것 같다.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가득 적혀 있다. 육아일기는 그 후 블로그에 기록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육아일기를 적는 횟수가 줄어 들어갔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채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