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함께 일하던 지감독이 사망하자 진짜 자기 자신이 누군지 골똘히 생각한다.
무소유가 가져다주는 여유와 편안함은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깨닫게 한다. 찬실이도 그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별것 아닌 게 원래 제일 소중한 거’라고 말할 줄만 아는 찬실이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장국영 유령이 (길잡이가 되어) 찬실이를 일깨워준다.
맑은 찬실이는 자신이 영화만 사랑하며 산 줄 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찬실이는 수줍은 표정으로 물어본다.
“영화를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밖에 모르던 프로듀서 찬실이 질문에 감독 영이 씨 대답이 걸작이다.
“영화보다 더 중요한 게 많죠. 사람들하고 함께 있는 것, 우정을 나누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그런 것들도 영화만큼 중요하죠.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할 일이 없어진 찬실이는 사랑이란 걸 해 보기로 한다. 찬실이가 한 말에 영이 씨가 “좋은 걸 보고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라고 맞장구 비슷한 말을 하자, 40살 찬실이는 영이 씨를 뒤에서 왈칵 안아버린다. 감정 표현을 해 버린다. 하지만 영이 씨는 그냥 누나로 생각할 뿐이라고 침착하게 말한다. 찬실이는 부끄러워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다.
영이 씨의 반응과 자신이 한 행동이 실망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찬실이에게 장국영 유령이 또 나타나 위로해 준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찬실 씨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위로는 효과가 있었다. 찬실이는 영화를 찍지 않으면서 자신을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라 여겨,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영화배우 소피의 집에서 매일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국영 유령의 위로 덕분에 주 2회만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와 함께 보낸다. 그렇게 영화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진다.
주인집 할머니 또한 찬실이 길잡이로 보인다. 주인집 할머니는 하고 싶은 건만 애써서 하며 하루를 보낸다. 애써서 하는 것들 중 하나가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거다.
노인복지회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주인집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인 70대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었다. 그때 한글 수업을 듣던 할머니들은 내가 숙제를 내주기만 하면 결석을 하셨다. 거의 수업만 진행해야 했었는데 찬실이 주인집 할머니는 한글 수업에서 시를 써 오라는 숙제를 가져왔다. 주인집 할머니는 찬실이와 나란히 앉아 시를 쓴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찬실이는 몽글몽글 멍해진다.
시를 쓸 때 아무거나 써도 되지만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된다고 웃으며 말했던 찬실이가 주인집 할머니가 쓴 알아볼 수 없는 시를 읽고, 눈물을 머금은 채 뭉클해진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찬실이는 그제야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진다. 물론 영화도 함께...
이제 절정이다. 모든 의미를 가진 마지막 대사다. 찬실이는 보름달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평온한 목소리로 고개 숙여 말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찬실이는 자신이 깨달은 걸 달에게 말하고 다짐하여 실천한다. 드디어 오늘을 살아간다.
엔딩 크레디트에 민요풍 노래가 흘러나온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아.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
사랑도 가고 청춘도 가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에헤이 에헤이야 어어라. 우겨라.
찬실이는 복도 많네.
~.~.”
반어적 표현이 내포한 긍정적 의미가 영화처럼 해학적이면서도 슬프다.
(이희문, “찬실이는 복도 많지.”)
(From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 한국,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