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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사 김과장 Mar 26. 2024

티베트에서 만난 사람들

라싸


야크호텔 도미토리는 8인실이었다.

거의 한 달간 도미토리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삐대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는 나의 스승이 되어 준 사람도 있었고, 친구가 되어 준 이도 있었다.

가끔 이해 못 할 말과 행동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역시 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






Pax Americana



길고 숱 많은 곱슬머리를 대충 말아 올려 비녀를 꽂았다.

항상 시원하게 웃는 미소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꾸미는 것엔 도통 관심이 없는지 얼굴과 드러낸 어깻죽지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히피 스타일의 조금 와일드한 중년 여자였다.

사흘 정도 같은 방에 묵었는데, 따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라싸를 떠나는 날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됐다.

의례적인 인사와 서로의 일정을 응원해 주는 덕담이 오간 후, 잠깐 시간이 남았는지 그녀는 배낭을 깔고 앉아 내게 말했다.


"오늘 간덴 사원에 다녀왔는데 식당에서 우연히 한국 아가씨 하나와 합석하게 됐어. 어쩌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왔네? 아가씨가 미국 정부 욕을 열심히 하더구먼. 물론 난 좀 기분이 나빴지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네가 잘못 아는 거다'라고 설명을 했지"


때는 2003년 가을이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두들겨 패고 있었고, 제멋대로 '악의 축'을 지정하는 미국의 도를 넘은 깡패짓과 대량살상무기 언급에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시기였다.



"생각해 봐, 1970년대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어? <킬링필드> 영화 봤어? 한국도 마찬가지야. 6.25 때 미국이 없었으면 한국이 지금 어떤 상황이겠어? 너희들은 지금 너희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힘들게 얻은 건지 몰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미국의 역할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희 세대는 전쟁의 무서움을 모르지. 요즘 세계적으로 반미감정이 강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찾는 나라가 어디야? 미국이잖아. 그리고 너희 나라에서도 수술을 받을 때, 실력 있는 의사를 못 찾으면 가는 곳이 어디야? 미국이잖아. 날 믿어. 미국은 좋은 나라야(Trust me, America is good)"



스물다섯의 나는 '대화'란 우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데서 시작하며, '토론'은 이견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내 의사 따위는 아랑곳 않고 대화의 주제를 선정했으며, 자신의 의견을 강요했다.

당황한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웃었고, 자기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교주가 한 마디 했다.



"관둬. 그 아줌마 이중국적자야. 이스라엘, 미국. 남편이 미국사람이래"








인연(因緣)



김 선생은 중년의 사진작가였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매체에 팔았고, 때로는 로케이션 헌팅도 했다.

2000년대 초반은 사진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던 과도기였지만, 여전히 주력은 필름이었다.

사진 원본의 힘이 강력하던 시절이었다.

김 선생은 그렇게 작품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는 루틴을 이어가고 있었다.

1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겪은 에피소드는 드라마보다 재미있었고, 어린 내 눈에 그의 삶은 로망이었다.

난 이미 역마살을 맞은 상태였지만, 그와의 만남은 삶의 방향성을 확정하는 확인사살이었다.


김 선생은 동행이 둘 있었는데 모두 성격 좋고 유쾌했다.

덕분에 그들이 라싸에 머무는 동안 자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들 중에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에 차량 수배나 예약 등 통역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나서곤 했다.

김 선생 일행이 떠나기 전날 밤, 그의 방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연신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번거롭고 귀찮았을 텐데, 내색 한번 안 하고 도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여행 중에 그런 사람도 여럿 만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나를 통역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그간 만났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에 분노했던 기억은 이런 사소한 감정의 나눔에서 사라지곤 했다.

김 선생과 일행은 언제나 겸손했고,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알았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도 갚는다는데, 진심이 담긴 한 마디면 그보다 더 한 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게다가 난 그에게 사진과 진로에 관한 조언도 들었고, 시도 때도 없이 음식과 술을 얻어먹었다.

겸연쩍어하는 날 보며 김 선생이 말했다.



"나도 학생 때 여행 다니면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어. 이탈리아에서 여권 털렸을 때 한 번은 말레이시아 아주머니가, 한 번은 한국 스님이 도와줬지. 나중에 스님께 빌린 돈을 돌려드리려니 스님이 그러시더군.

'난 어차피 그 돈 돌려받으려고 빌려준 게 아니라네. 자네도 나중에 자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베풀게나'

그 이후 스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했어. 너도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고, 앞으로도 받을 거야. 그러니 그걸 그대로 그 사람에게 보답하겠단 생각은 말고 네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때 도와. 그렇게 돌고 도는 게 세상 아니겠어?"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이후 그렇게 이어지는 작은 인연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을 살면서, 말세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도 끝까지 이 말을 놓지 않고 있다.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보다는 바보스러운 낭만주의자가 좋다.






야크호텔 마당




나의 삶 



나와 교주, 해랑이 야크호텔에서 근 한 달을 뭉그적거리다 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중심으로 한국 여행자들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사나흘, 길어야 열흘 일정으로 라싸를 거쳐간 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를 순차적으로 오가며 정보를 나누고 동행을 구하곤 했다.


우리는 간간히 야크호텔 마당에 모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어이없게도 당시 라싸의 재래시장 한편에는 조선족 교포가 운영하는 반찬가게가 있었다.

연길 쪽에 가면 볼 수 있는 중국식 한국 반찬이었는데, 백김치와 숙주나물도 있었다.

그 당시 티베트에서 김치를 맛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국 여행자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백김치랑 나물 몇 개 사다가 비빔밥 해 먹을까?"



여행이 길어지면 한식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한국 여행자들은 대부분 튜브형 고추장을 들고 다녔다.

시장에서 양푼 큰걸 하나 구한 후 근처 식당에서 밥과 계란프라이를 사다가 들이붓고, 중국산 참기름과 갹출한 고추장을 넣고 비볐다.

셰프는 매번 바뀌었는데, '음식은 손맛'이라며 비누로 깨끗이 손을 씻고 맨손으로 비비는 게 '국룰'이었다.

누가 봐도 개밥 같은 비주얼을 자랑했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이후로도 종종 그렇게 파티를 벌이곤 했다.


양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밥을 퍼먹는 우리의 모습은 다른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일본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숟가락을 들고 달려왔다.

간혹 서양 여행자들도 자리에 끼일 때가 있었다.

그렇게 온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부터 들고 온 무언가를 배낭에서 꺼내왔다.

그때는 개념도 몰랐는데 우리는 이미 팟럭(Potluck party)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의 초대 손님은 그리스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장을 보다 시간이 늦어져버렸고, 그는 30분 정도를 호텔 마당에서 기다려야 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말고 천천히 준비해. 느릴수록 좋아. 난 그리스 사람이잖아"



코리안타임이 그리스에도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때는 그저 미안하면서 동시에 나를 배려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난 후 그가 가져온 그리스식 곶감을 후식으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기 직업이 의사, 작가, 번역가 세 개라고 했다.



"직장에 얽매여 빡빡하게 사는 게 싫었거든. 프리랜서로 살 수 있는 직업을 찾았어" 



"부럽네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만 우리나라에선 쉽지가 않아요"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나? 몇 살에 뭐 하고, 몇 살에 애 낳고, 돈 많이 벌고, 뭘 해야 한다는 규칙은 사람들이 정한 거야. 네가 거기에 따라갈 필요는 없어. 네가 진정 하고 싶은 걸 찾아봐. 넌 아직 어린애(child)잖아"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고, 나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마흔일곱이다.

그날 먹었던 비빔밥에 고추장을 덜 넣어 싱거웠던 맛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생생한데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이 인생의 목표였다.

불과 6개월 사이에 가치관과 삶의 목표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은 사춘기 때보다 더 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삶의 방향타를 성공과 안정에서 재미와 행복으로 틀었더니 내게 남은 것은 나 혼자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지향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언제나 남보다 뒤처진 나를 볼 때 초조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친구들의 연봉이 얼마고, 어떤 차를 샀고, 승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흔들렸다.

가끔 괜찮다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40대 중반을 넘고 나서 의심이 사라졌다.

'불혹(不惑)'이란 개념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치열하게 30대를 달려온 친구들은 40대 중반이 되자 공허한 눈빛을 보였다.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건가?"


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들은 삶의 목표가 돈을 버는 게 되어버린 상황이 되자 당황스러워했다.


"넌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좋겠다"


라는 말도 들었다.

이런 상황을 계속 접하면서 '내가 택한 길이 틀리지는 않았구나'하고 안심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여전히 나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하면서 의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이 과정까지 거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모든 삶에는 의미가 있다.

자신의 잣대로 남의 삶을 판단하는 건 오만이다.

반대로 남이 나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그들은 틀렸으니까.

내 방향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나만 알 수 있다.






가미카제



여느 때처럼 조캉 사원 근처를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같은 도미토리에 묵는 중년의 일본 남자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함께 묵는 사나흘 동안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밤늦게 돌아와 침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통성명도 못했는데, 요행히 정신이 든 상태에서 만났다. 

숱 많은 곱슬머리는 잔뜩 구겨져있었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에 돋보기안경 너머로 보이는 작은 눈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눈인사를 건네자마자 갑자기 질문이 날아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지난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진지충이라 자부했건만 천외천(天外天)이다. 

카슈가르에서 만난 후지오카 씨도 그랬고, 내가 중국에서 만난 일본 중년 남성은 왜 다 이 모양인가. 

초면에 저따위 질문을 받은 게 어이없어서 잠시 멍한 표정을 보였더니,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미안한 말이지만 난 '한국'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고 '한국인'을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여행 중 만난 한국인은 대부분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어. 단지 그 사람들이 개인이 아닌 단체가 되어서 이야기할 때 보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더군. 글쎄... 과거에 일본이 택한 방법은 분명히 잘못된 방법이었어. 현재의 일본인 중 누구도 그런 역사를 반복할 생각은 없을 거야.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뿐 아니라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런 일들을 저질렀지. 역사적으로는 잘못된 결정이 '국가'의 이름아래 행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 물론 일본이 잘했다는 건 절대로 아니야. 일본도 그런 길을 걸었던 것이겠지"


한숨을 내쉰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삼촌은 가미카제 비행사였어. 가미카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사실과는 별개로 내 삼촌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도 사실이야. 과거사의 잘잘못을 떠나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분을 난 존경 한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결국은 억울하고 지겹단 얘기 아냐?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프레임은 꺼낼 생각도 마라. 이 문제는 너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피해자인 한국인에 대한 진심이 담긴 사과가 선행되지 않으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 볼 정도의 배려심, 아니 양심이 있다면 방금 같은 소리는,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할 수 없을 거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짧았다. 


"Ok, stop it. The truth is that Japanese slaughtered Korean and your people never said 'sorry'. We never ever forget our history."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말해 놓고도 분통이 터졌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대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난 지난 10년간 두 곳의 건설회사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4년 전 사고로 아내를 잃었지. 일도 힘들고,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잃은 것 같았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 그래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작년에 이곳으로 와서 카일라스에 올랐다. 그때는 아내를 기리기 위해서였고, 이번에 온 건 나 스스로를 정리하기 위해서야. 이제는 그 여정이 거의 끝난 것 같다. 이젠 잠시 미얀마에 들렀다가 뉴질랜드로 갈 거야. 이젠 그냥 낚시나 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

 


남자는 이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머리가 식고 나서도 지저분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크호텔 옥상 벤치에 늘어져 남자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결국 인정하고 사과하지 못하는 남자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나마 남자는 과거사에 대해서 알고는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만났던 일본의 젊은이들은 역사를 정말로 몰랐다. 



나는 하얼빈사범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가 있었던 곳이고, 일제 최악의 만행인 '마루타', 731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근원적인 분노, 적개심이 넘실대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얼빈에서 유학, 혹은 어학연수 중인 일본 학생은 꽤나 많았다.

당시 학교 유학센터의 외국인 학생 비율은 한국인 50%, 일본인 35%, 러시아인 10%, 기타 5% 정도였는데, 이는 하얼빈 내의 대학 유학센터 대부분이 비슷했다. 

일본 유학생 중에는 희한하고 재수 없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절하고 상냥했고 우호적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교류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화와 사고방식의 유사성 때문에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731부대 죄증 진열관. 출처: 하얼빈신문망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대단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방과 후 활동의 일환으로 '역사 투어'를 진행했는데, 장소가 하필이면 '731부대 죄증(범죄증거) 진열관'이었다. (* 일본 학생들을 여기 데려갈 생각을 한 유학센터의 패기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날은 영하 20도 아래로 수은주가 떨어진 겨울날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기념관은 스산했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로 향하는 길에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시시덕거리며 서로를 놀리고, 웃고 떠들던 얼굴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국 학생 중 누군가가 갑자기 "쪽바리 새끼들"이라며 증오를 표출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 역사일지언정,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이 이게 맞나 싶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던 친구를, 땀 흘리며 같이 운동하던 친구를 갑자기 '적'으로 인식하는 얼굴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부추기면 당장에 패싸움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였다.

분명히 그 순간, 그곳은 이성이 마비된 듯했다. 


전시관 안에서의 기억은 갑갑하고, 무거웠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현장에서 본 자료 사진들은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체험활동을 마치기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 일본 친구들의 얼굴이 궁금해져 슬쩍 그들 무리를 훔쳐봤다.

그들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람 그 공간을 떠다니는 듯했다. 

다음날 교실에서 만난 일본 친구에게 어제의 경험이 어땠는지 물었다.



"글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내가 한 일도 아니고, 예전에 일본군이 한 일이잖아?"



머리가 띵했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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