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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경 Aug 05. 2021

오븐 속 일기2-모닝빵과 베이글 사이 요상한 빵의 탄생

만족스러운 편견과 후회의 맛

며칠 전부터 막 구워져 따끈하고 결이 살아있는 식빵을 만들고 싶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빵을 반으로 쫘악 찢는

짜릿한 순간이 제일 기대됐다.


내일 막 구워낸 식빵으로 호화스러운 브런치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는 밤

밤이 지나는 동안 빵을 발효시키고 아침에 굽는 아주 효율적인 레시피를

참고하여 새벽에 작업을 시작했다.


베이킹 시작 전 다시 한번 레시피를 곱씹으며 익히는 중

나의 안일함에 좌절하게 되었다. 재료들 중 우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스트도 있는 마당에 우유가 없다니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왜 미리 준비를 안했냐며 후회에 휩싸여있다가

우유 대신 물과 두유를 넣어도 된다는 레시피 주인님의 코멘트를 보고

심기일전하여 냉장고 속 두유를 꺼냈다.


우유를 넣어 풍부한 고소함을 즐기고 싶었는데, 

첫 단계부터 삐끗했다. 두유의 고소한 콩 냄새가 유난히 건강하게 느껴져 슬펐다.


강력분을 털어 넣고 그다음 소금, 이스트, 설탕을 넣는데

이스트를 보관해놓은 지퍼백이 활짝 열려있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발효를 돕는 아이인데, 이렇게 상온에 공기랑 접촉한 채로 있어도 되는 건가..?

이럴 땐 공포스러운 의심이 대체로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주 작은 희망으로 베이킹을 이어갔다.


이 공포는 흰 설탕이 모자라 대신 갈색 비정제 설탕을 넣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내가 레시피대로 넣은 재료는 강력분과 소금뿐이라는 사실이

나와 식빵의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어졌다.


우유 대신 두유, 제 역할을 못할 것 같은 이스트, 흰 설탕 대신 갈색 비정제 설탕..

후회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갓 구운 하얗고 뽀송한 식빵을 찢어 아름다운 빵의 결을 즐기는 나의 로망은 이미 체념한 상태이고,

나 자신과 대타로 들어온 재료들을 응원하다 보니

도리어 정석을 빗나간 나의 재료들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유가 안 들어갔으니, 고소한 맛을 위해 버터를 첨가하기로 결정했다.

10g을 추천한다는 댓글을 봤으나, 버터는 다다익선이라는 나의 철칙 아래에 15g을 넣기로 결정했다.

1g이 실수로 더 들어가 16g이 되어버려 덜어 낼까 하다가

버터니까 봐줬다. 


10분 동안 손반죽을 했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반죽을 하는데,

꽤나 힘들어 언제 끝나나 힐끔힐끔 타이머를 계속 보게 된다.

내가 즐기는 베이킹 명상 타임이 이때 구나 싶었다.

단순노동으로 머릿속 생각들이 정리되는 시간.

모든 세포가 팔에 몰리는 느낌이다.

내 팔과 밀가루만 생각하게 되는 간단하고 귀중한 시간이다.








반죽이 끝나고, 하나로 뭉쳐준 다음 1차 발효를 시작한다. 전자레인지 안에 따뜻한 물을 함께 넣어주고 

1시간 잘 쉬고 만나자. 그동안 예쁘게 2배 정도 잘 커주렴.

애정 어린 바람과 함께 발효를 시작한다. 








추운 겨울, 게다가 새벽 두 시에 따뜻하게 예열돼있는

전기장판 속에서 1시간을 뜬 눈으로 발효를 기다리는 건 

매우 힘든 일이지만, 이대로 잠이 들어 

아침에 내가 아닌 가족 중 한 명이

전자레인지 속 의문의 밀가루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상상하며

깨어있으려 노력했다.  


어젯밤만 해도 새벽에 잠이 안 와 영화도 보고, 핸드폰도 실컷 하다가 잠들었는데

자지 않아야지 생각하니 이렇게까지 졸려하다니

역시 반대가 끌리는 법인가? 우스웠다.


1시간 5분이 지날 때쯤 겨우 몸을 일으켜 반죽에게로 향했다.

2배로 부풀어 퐁실퐁실해진 아이를 기대했건만

나의 반죽은 여전해 보였다. 혹시 내가 발효 전 반죽 사이즈를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

발효 전 사진과 비교해봤지만, 무섭게도 크기는 같았다.


이스트 탓이군.






아예 예상 못했던 결과는 아니어서 나름 침착하게 반죽을 몇 번 찔러보고

눈에 안 띄어도 양심껏 발효됐겠지 하며 식빵 틀에 반죽을 옮겨 담았다


시간이 약이길 바라며, 내일 아침까지 충분한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며 발효되길 

발효의 기적이 일어나라. 일어나라. 속으로 되뇌며 

식빵 틀을 냉장고에 넣고 자러 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빵 생각부터 했다. 발효가 과연 얼마큼 됐을까?

서둘러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냈다.


반죽이 "저는 변하지 않는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 분, 한 시간 사이에도

이리저리 마음이 변하기도 하는데 너는 그대로네.

세상에서 제일 정직한 반죽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을 바꿔 발효가 되어주려나 싶어 따뜻한 이불속에 옮겨줬다.

따뜻한 온도로 살살 달래줘야지.

몇 분 지나 열어보니 일단 크기는 비슷하다. 발효 상태를 보려고 찔러보니

확실히 이불에 넣기 전보다는 뭔가 말랑해진 것 같긴 하다.


그래 반죽아 이만하면 됐다. 고생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가자!


참고한 레시피에서 오븐과 에어프라이어 두 곳에서 모두 베이킹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봤을 때는

에이, 아무리 그래도 베이킹은 오븐이지. 에어프라이어는 뭔가 부족한 환경인 느낌이랄까.

생각했다.









하지만 레시피 속 재료와 과정을 모두 빗나가고 있는 이 반죽은

오븐이 아닌 '에어프라이'로 들어가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결말 같았다.

모든 모험을 끝내고 장렬히 전사하는 결말이 눈 앞에 그려졌다.






아주 약간의 희망과 기대, 압도적인 해탈의 감정으로 빵을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타이머를 13분에 맞췄다.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몇 분 지나자 고소한 빵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이번 빵을 굽는 내내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었다.

나의 작은 희망이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타이머가 울리고 에어프라이어를 열자,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을 띤 포송포송한 빵이 완성되어있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환호성을 지른 후 에어프라이어를 통째로 들어

집 이곳저곳을 누비며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했다.


반으로 갈라서 맛을 보자 매우 건강하고 심심한 맛이었지만 먹을 만하다는 사실에

이 빵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역시 베이킹에 실패는 없다. 밀가루와 버터가 만나면 뭐라도 되어서 나온다는 나의 철학은 빗나가지 않는다!


먹다 보니 빵의 안쪽이 안 익은 듯 질척한 떡 같은 식감이 느껴졌다. (찾아보니 발효가 잘 안된 상태면 떡의 식감이 난다고 한다.)


한번 더 구우면 괜찮을 것 같아 구워서 먹으니 묘하게 베이글 맛도 나고 고소하고 맛있었다!

버터와 잼을 곁들이니, 더욱 꿀맛!



레시피의 재료와 과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느꼈던 후회, 베이킹에는 맞지 않을 거라는 편견의 에어프라이어 이 두 가지가 완성한 빵은 나를 매우 만족시켰다.

이 빵에게 가졌던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머쓱할 정도로.


만약 우유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후회만 가득한 채 베이킹을 멈췄으면 어땠을까?

만약 에어프라이어를 한 번도 안 써봤다면 어땠을까?

후회와 편견은 내가 아는 씁쓸하고 외로운 맛 그대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와 편견을 다 넣어 끝까지 완성한 나의 빵은

고소하고 바삭하니 맛있었다.


돈 주고도 못 사 먹을 모닝빵과 베이글 사이 요상한 빵의 맛을 볼 줄이야

역시 생각했던 걸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새로운 것들 천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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