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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l 10. 2024

힘들어도 좋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이제 겨우 15% 남짓 왔으니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처음 며칠이야 들뜬 기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발걸음도 가벼웁게 걸어왔지만 어느새 100km 넘게 걸어왔으니 슬슬 힘들 때를 지나도 한참 지난 터.  아이들의 몸 상태가 어찌 걱정이 안 될까.  하지만 내 몸 하나 추스르기에도 버거운지라 세밀하게 살피지는 못하는 상태다.  


  걷는 자세를 보면 발에 이상이 있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기에 간간히 살펴보고는 있었다.  군 복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날부터 꾸준하게 쿠션을 보충해 주고 땀도 흡수해 주는 아이템(생리대)을 운동화에 깔아주기는 했지만 경험상 삼일은 넘기기 힘들 텐데 아무 소리도 없는 게 이상하다.  기술이 발달해서 그런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둘째의 발걸음이 영 수상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걷기 불편한 것이 분명한데 별다른 내색이 없다.  눌러쓴 모자와 주머니 깊숙하게 집어넣은 두 손은 여전하다.  제 딴에는 버틸 만한데 굳이 아쉬운 소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반면 아이들은 첫날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잘 걸어간다.  슬슬 아이들의 속도를 맞추는 게 힘들어진다.  가벼운 운동화가 군화보다 무겁게 느껴지고 7kg 남짓한 배낭도 완전군장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벌판이 내게는 가파른 산비탈만큼이나 버겁게 다가온다.  이건 뭐지?  군대에 다시 끌려 온 기분이다.  나이 오십 넘어 이게 뭔 고생인지.  에고, 무상한 세월이여.


  드넓은 벌판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이 얼마나 감사한 자연의 선물인지. 근데 발만큼은 해당되지 않나 보다.  물집이라도 잡히려나 발바닥에 이물감이 느껴진다.  순간 아이들은? 하는 생각에 두 녀석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보니 가볍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겁거나 불편해 보이지도 않는다. 부럽다.


  점심 먹고 두어 시간쯤 지났을 무렵부터 둘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아마도 체력이 많이 빠졌거나 발바닥에 이상이 생겼으리라.  단순히 배낭여행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말도 잘 통하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도 쉬운 한국에서 하면 되는데 왜 굳이 스페인까지 와야 했느냐는 녀석의 말에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어 설명해 줬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어폰을 끼고 있다.  이런 된장.  물어본 게 아니라 투정 부린 거군.  가만!  분명 와이파이가 안 될 텐데?  녀석에게 물어보니 유튜브를 못 보니 미리 저장해 놓은 음악을 듣고 있다고.  아, 그건 생각 못했다.


  드넓은 벌판 끝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지친 몸을 위로해 줄 숙소가 멀지 않았다.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지만 눈에만 그리 보일뿐 실제로는 한 시간 거리.  끝까지 속도 유지하고 걷자꾸나.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지만 그런 것은 있을 리 없으니 그저 찬물에 씻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한결 몸이 가볍다.  스페인 전통 요리인지 만국 공통 요리인지 정체 모를 요리지만 입에 맛있으니 상관없다.  소시지에 고기도 있으니 금상첨화다.  깨작거리는 둘째에게 힘들더라도 먹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니 그래도 먹어준다.  에구, 고맙다.


  저녁을 잔뜩 먹은 탓에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는 와중에 둘째가 쭈뼛쭈뼛 거리며 나타났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설마 한국 가자는 건 아니겠지.  제발 그 말만은.


  내 염려와는 달리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발을 내밀며 치료해 달라고 한다.  어?  아까 씻지 않았나?  분명 샤워실에 들어가는 걸 봤는데 발에 선명한 저 때들은 뭐지?  에휴, 또 물만 묻히고 나왔구나.  치료하려면 발이 깨끗해야 하니 가서 다시 씻고 나오라고 하니 어기적거리면서 돌아선다.  이그, 피곤할수록 잘 씻어야 개운해질 텐데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보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땐 씻는 걸 꽤나 싫어했구나.


  씻고 나오는 녀석을 침대에 앉히고 발을 살펴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물집 하나랑 그 보다 더 작은 물집 두 개가 생겼다.  다행히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바늘에 실을 꿰어 소독약을 뿌리고는 한 땀 한 땀 꿰매주었다.  예쁘게 리본을 만들어주려 했는데 얇은 실이라 모양이 안 나와 그냥 묶어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실을 통해 물이 빠져있을 것이다.  5분 채 걸리지 않은 대수술을 마치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녀석에게 한 마디 건넨다.  발을 높이 하고 누워 있으라고.  첫 째는 어떤가 하고 살펴보니 아직 상태가 양호해 보인다.  너도 발을 높이 하고 누워 있어라.


  나도 발을 높이 하고 누워 있자니 조금 전 둘째가 내게 다가오던 장면과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응가하고 나면 응가 묻은 똥꼬를 내게 들이밀며 닦아 달라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누구라도 기겁할만한 장면인데도 내 아이라는 이유로 응가 묻은 똥꼬가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냄새나는 궁디를 내미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은 부모만이 느끼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 것 감정일터.  이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들이 언젠가부터 내 승질만 돋구는 아이들로 인식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이 사춘기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무언가 알 수 없는 – 욕심이나 창조주 콤플렉스 같은 – 것들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이유도 상당할 것이다.


  오랜만에 아이들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행복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보니 벌써 잠이 들었다.  그래, 잘 자라.  니들은 잘 때 더 이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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