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불쾌한 경험 때문인지 잠자리가 사나워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챙겨야 할 아이들도 있으니 내색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도 제법 기운이 나니 다행이라면 다행.
아이들을 데리고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화창한 날씨가 오늘의 하루를 예견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며 길을 걸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작은 녀석은 말이 없다. 대신 어제의 경험 때문인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나름 걱정이 되나 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니 어제 같은 상황에 대비하기가 상대적으로 좋다. 주변에 늘어선 멋들어진 유럽풍의 상가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50m 정도 앞에 있는 건물이 마지막인 것 같다. 그 뒤로 펼쳐진 넓은 평야가 건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순간, 옆구리에 뭔가 기분 나쁜 뭔가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 쳐다보니 이런 찔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제 그놈이 틀림없다. 썩을 놈. 어제 한 대 맞았으면 그냥 재수 없는 날이구나 하고 다시 열심히 일하면 되지 굳이 나를 찾아내 복수를 해야 했냐. 복수는 꿈도 못 꿀만큼 밟아 놨어야 했나? 복수할 거라 생각하고 버스든 택시든 얼른 잡아타고 다음 마을로 이동했어야 했나?
아이들을 향해 “뛰어”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을 넓게 펴서 놈의 얼굴에 대고 쓸어내렸다. 잠시뿐이겠지만 놈이 눈을 비비면서 시야를 확보하는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니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냅다 뛰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근처 마트나 식당으로 들어가 도와달라고 할 것이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수없이 주지 시켰던 것이 바로 위급상황 때의 행동 요령이었으니 잊지는 않았으리라.
나 역시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으니 아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옆구리의 상처로 인해 전혀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도로를 내달리는 차량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웬 동양인 하나가 피를 흘리며 차도를 헤집고 다니니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내가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웅성웅성거리자 놈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겠다 판단했는지 도망간다. 도망가는 놈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통증이 몰려왔다. 옆구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고 몇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아마도 구급차 아니면 경찰이겠지.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하고 신속하게 태우더니 출발을 해버린다. 스페인어도 못하는 내가 어버어버하며 아이들이 있다고,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아파서 그러는 줄 안다. 아놔, 바디랭귀지는 만국공통어 아니었나?
결국 아이들을 잃어버렸다. 분명 마트 같은 곳에 가서 도와달라고 하고는 가까운 경찰서로 피해있으라 했는데. 경찰서가 마트처럼 많지는 않을 텐데.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려 퍽 난감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빠를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스페인어는커녕 영어도 못하는 아이들 걱정에 입술이 마른다. 그래도 미리 숙지시켜 둔 비상시 대처법대로만 했으면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속이 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