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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l 02. 2024

워메, 이 길이 아닌게벼.

  길을 떠난 지 삼 일째.  오늘과 내일이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고비가 될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체력 회복이 무척이나 빨랐다.  자고 일어나면 마치 첫날인 것 같은 걸음걸이는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하겠다.  결국 고비를 맞는 건 우리가 아니라 나 혼자일 것 같다.     


  아침 해가 밤새 머물렀던 어둠을 밀어낼 무렵에 길을 나서니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하다.  바람 속에 담긴 이슬을 머금은 나무와 풀잎의 그윽한 향이 폐부 깊숙하게 들어오니 상쾌함이 더해지며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살을 조금만 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아이들도 자연의 상쾌함을 만끽하고 싶은가 보다.  큰 녀석은 살짝 뒤처져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따라오고 작은 녀석은 저만치 앞서 걸으며 혼자 사색을 즐기는 듯하다.  주머니 깊숙하게 손을 집어넣은 채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 걷는 것이 깊은 사색에 빠졌나 보다.  그렇게 세 남자는 말없이 걷는다.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들의 모습과 곳곳에 세워진 광고판에서 나타나는 야한 모습들을 보고 첫째가 숨길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띠며 묻는다.  기회다 싶어 성 개방 문화에 대한 생각을 듣기도 하고 성의 아름다움과 위험성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간 쑥스러워 시도조차 못했던 성교육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근데 17살의 사내 녀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진함을 장착한 큰 아들의 모습에 조금은 놀랬다.  순진한 척을 하는 건지 진짜 순진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  나는 그 나이 때 분명 요놈보다는 더 많이 알았던 것 같은데...     


  한참을 걷다 보니 여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시골 마을이니 가구 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없어도 너무 없다.  멀리 두어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영화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유럽의 시골 마을의 모습이다.  너무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고 싶어 잠시 쉬기로 했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며 발을 주물럭거린다.  아무래도 발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나 보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너무나 고요했다.  들리는 건 오직 바람 소리뿐.     


  응?  잠깐.  아무리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도 없다고?  동네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함께 출발했던 그 많던 순례자들은 다 어디로 갔누?  분명 한두 팀 정도는 가까이 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순례자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점심때였으니 세 시간 넘게 우리만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혹 우리가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길가에 간간이 보이던 이정표도 못 봤던 것 같다.  특별히 길을 헷갈릴만한 곳은 없었는데.  아, 땀난다.     


  해맑은 우리 장남은 여전히 냄새나는 발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콧구멍도 후벼가며.  반면 눈치 빠른 둘째가 나를 쳐다본다.  영 찜찜하다.  녀석의 시선을 피해 핸드폰을 보는 척 지도를 확인했다.  아, 다행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살짝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을 뿐.  둘째 녀석이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녀석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이 너무 궁색했기 때문에.  그리고 녀석의 잔소리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주섬주섬 가방을 다시 매고 길을 재촉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떼어냈다.  대답 없이 따라나서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다행히도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 니들도 힘들 텐데 걍 걷자꾸나.


  지도를 다시 확인해 보니 한 시간쯤 돌아간 것 같다.  다행히 크게 돌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특히 작은 아이도 잠시 길을 돌아가는 중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빨리 자라기 원해서 작은 실수에도 너무 요란하게 반응한 것은 아니었는지, 아직 젖을 먹어야 할 시기에 급하게 이유식마저 제치고 어른들의 밥상을 들이민 것은 아니었는지.  덩치는 그럭저럭 많이 컸지만 여전히 아이인 것을 자꾸만 잊어버리고 혹은 무시하고 성인의 몫을 감당하기를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커져만 간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이제 와 후회해 봐야 돌이킬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니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찾는 게 낫겠지.  여기까지 와서 머나먼 길을 걷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나.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행의 끝자락에 변화되어 있을 모습을 그려보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셋이서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상상을 하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  지금 내딛는 걸음이 쌓일 때마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 생각하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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